[조력존업사법 발의에 대하여] 생명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조력존업사법 발의에 대하여
2. 크리스천 의사의 시각에서
2. 크리스천 의사의 시각에서
생명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조력존엄사법의 문제와 반대해야 하는 이유
조력존엄사법의 문제와 반대해야 하는 이유
지난 6월, 국내 최초로 ‘조력존엄사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조력존엄사법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가 희망하는 경우 담당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개념이다.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라고도 불린다.
조력존엄사를 두고 생명경시냐,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냐의 대립이 첨예하다. 크리스천들은 조력존엄사법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까? 2회에 걸쳐 크리스천 밥학자와 의사의 시각에서 조력존엄사법을 고찰하는 글을 싣는다.
/ 편집자주
조력존엄사를 두고 생명경시냐,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냐의 대립이 첨예하다. 크리스천들은 조력존엄사법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까? 2회에 걸쳐 크리스천 밥학자와 의사의 시각에서 조력존엄사법을 고찰하는 글을 싣는다.
/ 편집자주
안규백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지난 6월 ‘조력존엄사’ 법안을 발의했다. 조력존엄사라고 했지만 결국 안락사 허용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수단으로 죽음을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생명을 살리는 의사의 손을 빌려 의료기관에서의 자살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이 법안이 왜 문제가 있는지, 우리가 왜 반대해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조력존엄사법의 문제점
첫째, 조력존엄사라는 생소한 단어를 사용해 존엄한 죽음의 개념에 혼동을 일으켰다. 이미 의사의 조력으로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해 자살하는 행위를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라고 부른다. 이 법안에서도 의사에 대해 ‘자살방조죄’ 적용을 배제한다고 함으로써(안 제20조의7) 이 행위는 ‘자살’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통상적으로 존엄한 죽음이란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집착하지 않고 통증이 완화된 상태로 삶을 정리하며 자연사하는 것을 말한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을 존엄사라고 하면 안 된다. OECD 1위 자살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자살이 조금이라도 존엄하다는 개념과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법안에도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존엄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둘째, 설문조사의 질문과 답을 왜곡되게 인용하였다. 의원실은 법안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국민의 82%가 의사조력자살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질문이 “조력존엄사를 도입함으로써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자는 입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다. 긍정적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자는 입법을 단박에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찬성의 이유에 대한 답변은 법안이 제안하는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과는 사뭇 다르다. 고통의 경감 때문에 조력자살을 택하겠다는 경우는 찬성자의 13%에 그쳤다. 나머지 87%는 죽음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거나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에, 또는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거나 의료비가 부담된다는 이유로 조력자살법을 찬성했다. 이 법안이 만들어지면 말기 환자의 통증과는 무관하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우울감이나 사회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사람마저 안락사나 조력자살의 대상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조력자살 대상에 대해 단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라고만 한 점이다. 고통은 주관적이어서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2001년부터 상기 법안과 동일한 조건으로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한 네덜란드의 경우 20년 동안 고통의 대상을 확대해 왔다. 네덜란드에서는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조력자살을 택하는 일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8년 정신질환을 이유로 20대 여성의 조력자살을 허락했다. 2020년 4월에는 고통의 상태를 중증 치매 환자로 확대했고, 10월에는 스스로 고통의 정도를 표현했다고 보기 어려운 신생아부터 12세 미만 불치병 아동까지 확대하였다. 안락사 허용법은 걷잡을 수 없이 생명경시 현상이 나타나는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의 실례가 되었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수용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으로 안락사를 한정할 생각이었으나 한번 터진 물꼬를 막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마지막으로 조력존엄사를 신설하면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에 끼워 넣었다는 점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은 무의미한 의료집착을 중단하고 자연사(自然死)를 돕는 법이다. 이 법안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통해 고통을 줄여서 주어진 모든 삶을 존엄하게 살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자연사를 거슬러 인위적으로 죽게 하는 행위를 동일 법안에 넣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는 상반된 방법에 대해 이름을 위장해 동일 법안처럼 다루면 안 된다.
둘째, 설문조사의 질문과 답을 왜곡되게 인용하였다. 의원실은 법안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국민의 82%가 의사조력자살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질문이 “조력존엄사를 도입함으로써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자는 입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다. 긍정적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자는 입법을 단박에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찬성의 이유에 대한 답변은 법안이 제안하는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과는 사뭇 다르다. 고통의 경감 때문에 조력자살을 택하겠다는 경우는 찬성자의 13%에 그쳤다. 나머지 87%는 죽음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거나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에, 또는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거나 의료비가 부담된다는 이유로 조력자살법을 찬성했다. 이 법안이 만들어지면 말기 환자의 통증과는 무관하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우울감이나 사회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사람마저 안락사나 조력자살의 대상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조력자살 대상에 대해 단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라고만 한 점이다. 고통은 주관적이어서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2001년부터 상기 법안과 동일한 조건으로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한 네덜란드의 경우 20년 동안 고통의 대상을 확대해 왔다. 네덜란드에서는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조력자살을 택하는 일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8년 정신질환을 이유로 20대 여성의 조력자살을 허락했다. 2020년 4월에는 고통의 상태를 중증 치매 환자로 확대했고, 10월에는 스스로 고통의 정도를 표현했다고 보기 어려운 신생아부터 12세 미만 불치병 아동까지 확대하였다. 안락사 허용법은 걷잡을 수 없이 생명경시 현상이 나타나는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의 실례가 되었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수용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으로 안락사를 한정할 생각이었으나 한번 터진 물꼬를 막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마지막으로 조력존엄사를 신설하면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에 끼워 넣었다는 점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은 무의미한 의료집착을 중단하고 자연사(自然死)를 돕는 법이다. 이 법안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통해 고통을 줄여서 주어진 모든 삶을 존엄하게 살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자연사를 거슬러 인위적으로 죽게 하는 행위를 동일 법안에 넣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는 상반된 방법에 대해 이름을 위장해 동일 법안처럼 다루면 안 된다.
조력자살법안 반대해야 하는 이유
첫째, 죽음은 나 혼자의 권리가 아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가족과 이웃은 물론이고 동료나 담당 의료진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자살을 택하면 자신의 인생만을 마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은 가족들의 인생에 평생 깊은 상처를 준다. 반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응어리를 풀고 떠나는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선물이 된다.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지혜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인간 생명이 시작할 때 스스로 권리를 부여할 수 없듯이, 생명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 자연사할 때까지 적절한 돌봄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존엄한 인간의 권리다.
둘째, 안락사는 그 대상의 범위를 한정 지을 수 없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명제는 극심한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선한 일이고,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 대상의 선정에 있어서 이 명제는 틀렸다.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선한 일이라면 육체적 고통에만 적용할 이유가 없다. 정신적 고통이나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의 자기결정권도 인정해야 한다. 또 이 주장에 따르면 의사표현을 못해도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좋은 행위이니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중증 치매 노인이나 식물인간 상태, 불치병에 걸린 영유아들 또한 안락사 대상이 되는 꼴이 된다. 이것이 안락사 허용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셋째, 말기 환자가 고통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할 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무리 자기결정권으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다. 가족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에 대한 부담,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인생은 죽는 것이 낫다는 압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법안이 마련되어 병원에서 안락사를 강요하는 분위기라면 살고 싶다는 진실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정작 본인은 가족들의 삶을 하루라도 더 보고, 사랑의 관계 속에 돌봄을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심이다.
넷째, 안락사 법안은 생명을 끝까지 보존하려는 의사들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의사들은 오직 환자의 생명과 그들의 치료를 위해 존재한다. 고통을 없앤다는 목표가 아무리 명확해도 환자를 죽이는 일에 의사의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의사조력자살은 의사들의 의료윤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만약 의료윤리를 위배해도 좋다고 사회가 합의하게 되면,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음의 기술을 의대생 시절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둘째, 안락사는 그 대상의 범위를 한정 지을 수 없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명제는 극심한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선한 일이고,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 대상의 선정에 있어서 이 명제는 틀렸다.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선한 일이라면 육체적 고통에만 적용할 이유가 없다. 정신적 고통이나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의 자기결정권도 인정해야 한다. 또 이 주장에 따르면 의사표현을 못해도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좋은 행위이니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중증 치매 노인이나 식물인간 상태, 불치병에 걸린 영유아들 또한 안락사 대상이 되는 꼴이 된다. 이것이 안락사 허용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셋째, 말기 환자가 고통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할 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무리 자기결정권으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다. 가족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에 대한 부담,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인생은 죽는 것이 낫다는 압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법안이 마련되어 병원에서 안락사를 강요하는 분위기라면 살고 싶다는 진실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정작 본인은 가족들의 삶을 하루라도 더 보고, 사랑의 관계 속에 돌봄을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심이다.
넷째, 안락사 법안은 생명을 끝까지 보존하려는 의사들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의사들은 오직 환자의 생명과 그들의 치료를 위해 존재한다. 고통을 없앤다는 목표가 아무리 명확해도 환자를 죽이는 일에 의사의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의사조력자살은 의사들의 의료윤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만약 의료윤리를 위배해도 좋다고 사회가 합의하게 되면,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음의 기술을 의대생 시절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치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현대 의학에는 수용할 수 없는 통증을 견딜 만하게 경감시키는 다양한 통증 조절법이 있다. 환자가 호스피스·완화치료 센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서 안락사가 아닌 고통을 줄이는 치료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 2020년, 말기암 환자 77%가 완화의료를 받지 못하고 통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안락사법이 아닌 호스피스 지원법을 만들어 호스피스 병상을 기다리다 죽는 환자가 없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치료에 드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의료비가 없어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육체적 통증 완화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심리적·영적 돌봄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함께하며 심리적으로 돌봄을 받고, 죽음 이후 상태에 대해 영적으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면 안락사나 조력자살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죽음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건 안 된다”라고 하고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물을 수 있어야 존엄한 사회다. 그것이 사회적 웰빙(Well-Being)이다. 존엄사는 인생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의 삶을 돌봐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도들은 그 숨이 그칠 때까지 하나님께로 그 영혼을 안내하는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문지호 집사(한강공동체, 의료윤리연구회 회장)
/ 문지호 집사(한강공동체, 의료윤리연구회 회장)
<발문>
존엄사는 인생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의 삶을 돌봐주는 것이다.
숨이 그칠 때까지 하나님께로 영혼을 안내하는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삶을 돌봐주는 것이다.
숨이 그칠 때까지 하나님께로 영혼을 안내하는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