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함께 떠나는 선교 여행] 강화교산교회 / 상상력으로 시작된 교회
목사와 함께 떠나는 선교 여행
'강화교산교회'
'강화교산교회'
상상력으로 시작된 교회
“서양 오랑캐가 우리 땅을 밟으면 쫓아가서 그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
푸른 눈의 선교사가 세례 자원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제물포에서부터 힘든 뱃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배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섬뜩한 경고를 들었다. 협박이었다. 강화의 첫 번째 세례는 이대로 멈추는가? 큰 벽 앞에 섰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물포에서 예수를 알게 된 이승환이 홀로 계신 노모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려 고향 강화도를 찾았다. 어머니께 말씀을 읽어드리고 복음을 전했다. 어머니 역시 복음의 주인공이 되고자 세례를 청원하였다. 그래서 푸른 눈의 선교사가 강화도에 도착했는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선교사는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기어이 세례를 베풀었다. 그 선교사가 바로 존슨 선교사다. 그렇게 강화의 첫 번째 세례자가 탄생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밀고 나가 세례를 준 것일까? 아무리 큰 반대와 협박이 있더라도 순교를 각오하고 직진해서 성공한 것일까? 둘 다 아니다. 당시 필요한 것은 상황을 돌파하는 상상력이었다. 배에서 내릴 수 없으면 배에서 세례를 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이승환은 늙으신 어머니를 업고 강화의 질퍽한 갯벌을 헤치고 선교사가 타고 있는 배에 올라갔다. 그리고 선상 세례가 이루어졌다. 강화의 첫 세례는 선상 세례였다.
바로 그 선상 세례가 강화교산교회와 감리교의 강화선교의 시작이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상황을 돌파하는 상상력’이 그렇다.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주변의 반대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잠깐 멈추면서 소나기를 피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직진할 것인가? 어떤 것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강화교산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내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강화교산교회는 선상 세례라는 씨앗으로 시작되었고, 강화도에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모판으로 성장했다. 특히 하나님은 선교사의 입도를 강하게 저항했던 김상임을 감화시켜 가장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세워주셨다.
강화교산교회는 설립 5년이 되기 전에 교인 스스로 헌금해 예배당을 마련했다. 선교사를 의지하기보다 교회 스스로 성장하고자 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강화교산교회의 담당교역자 중에 선교사가 없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까? 강화교산교회는 강화의 모교회로서 전도인을 파송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등 기꺼이 복음 전하는 일을 감당했다. 당시 조선의 어느 교회보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감리교의 신앙풍토를 조성하는 첫 교회로서의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강화교산교회가 창립 130주년을 맞이했다. 1960년대 네 번째 예배당이자 초대교회 공로자 ‘김상임 전도사 기념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석조예배당이 지금은 ‘강화초대기독교선교역사관’으로 탈바꿈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옆에는 1980년대 어느 집사님의 기증으로 세워진 종탑이 있다. 휘감은 넝쿨이 교회가 견뎌낸 그 긴 세월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강화초대기독교선교역사관은 강화교산교회의 초대 3인(존슨 선교사, 이승환, 김상임)의 부조부터 양 벽면에 교산교회, 강화초대교회의 이야기까지 알차게 담고 있다. 중앙에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들이 있다. 소소하게 체험공간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다. 이곳이 예배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방문객들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돋보인다.
느린 걸음으로 전시된 글씨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읽어가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을 돌파하는 상상력에서 시작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해서 오늘까지 왔는지를 깊이 묵상했다. 오늘 내게 필요한 상상력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나서 교회를 나왔다.
/ 이세영 목사(대전온누리교회, 나우리트릿 대표)
푸른 눈의 선교사가 세례 자원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제물포에서부터 힘든 뱃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배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섬뜩한 경고를 들었다. 협박이었다. 강화의 첫 번째 세례는 이대로 멈추는가? 큰 벽 앞에 섰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물포에서 예수를 알게 된 이승환이 홀로 계신 노모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려 고향 강화도를 찾았다. 어머니께 말씀을 읽어드리고 복음을 전했다. 어머니 역시 복음의 주인공이 되고자 세례를 청원하였다. 그래서 푸른 눈의 선교사가 강화도에 도착했는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선교사는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기어이 세례를 베풀었다. 그 선교사가 바로 존슨 선교사다. 그렇게 강화의 첫 번째 세례자가 탄생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밀고 나가 세례를 준 것일까? 아무리 큰 반대와 협박이 있더라도 순교를 각오하고 직진해서 성공한 것일까? 둘 다 아니다. 당시 필요한 것은 상황을 돌파하는 상상력이었다. 배에서 내릴 수 없으면 배에서 세례를 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이승환은 늙으신 어머니를 업고 강화의 질퍽한 갯벌을 헤치고 선교사가 타고 있는 배에 올라갔다. 그리고 선상 세례가 이루어졌다. 강화의 첫 세례는 선상 세례였다.
바로 그 선상 세례가 강화교산교회와 감리교의 강화선교의 시작이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상황을 돌파하는 상상력’이 그렇다.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주변의 반대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잠깐 멈추면서 소나기를 피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직진할 것인가? 어떤 것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강화교산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내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강화교산교회는 선상 세례라는 씨앗으로 시작되었고, 강화도에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모판으로 성장했다. 특히 하나님은 선교사의 입도를 강하게 저항했던 김상임을 감화시켜 가장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세워주셨다.
강화교산교회는 설립 5년이 되기 전에 교인 스스로 헌금해 예배당을 마련했다. 선교사를 의지하기보다 교회 스스로 성장하고자 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강화교산교회의 담당교역자 중에 선교사가 없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까? 강화교산교회는 강화의 모교회로서 전도인을 파송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등 기꺼이 복음 전하는 일을 감당했다. 당시 조선의 어느 교회보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감리교의 신앙풍토를 조성하는 첫 교회로서의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강화교산교회가 창립 130주년을 맞이했다. 1960년대 네 번째 예배당이자 초대교회 공로자 ‘김상임 전도사 기념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석조예배당이 지금은 ‘강화초대기독교선교역사관’으로 탈바꿈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옆에는 1980년대 어느 집사님의 기증으로 세워진 종탑이 있다. 휘감은 넝쿨이 교회가 견뎌낸 그 긴 세월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강화초대기독교선교역사관은 강화교산교회의 초대 3인(존슨 선교사, 이승환, 김상임)의 부조부터 양 벽면에 교산교회, 강화초대교회의 이야기까지 알차게 담고 있다. 중앙에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들이 있다. 소소하게 체험공간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다. 이곳이 예배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방문객들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돋보인다.
느린 걸음으로 전시된 글씨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읽어가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을 돌파하는 상상력에서 시작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해서 오늘까지 왔는지를 깊이 묵상했다. 오늘 내게 필요한 상상력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나서 교회를 나왔다.
/ 이세영 목사(대전온누리교회, 나우리트릿 대표)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