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기독문화재'] 스스로 무너뜨린 교회는 재건되지 않는다!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기독문화재’
스스로 무너뜨린 교회는 재건되지 않는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난 ‘철원감리교회’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난 ‘철원감리교회’
가을이 깊어가니 겨울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아침마다 옷차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때이다. 겨울이면 일기예보에서 자주 듣는 곳이 ‘철원’이다. 철원은 겨울의 대명사처럼 추운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전국에서 가을걷이가 가장 먼저 끝나는 고장이기도 하다. 철원은 김제와 함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철원 들에서 생산되는 오대미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철원 농산물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혹독한 추위 못지않게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철원은 순우리말로 ‘쇠둘레’라 한다. 예부터 땅속에 철이 많아 그것이 여름이면 뜨거워져 더 덥다고 말해왔다. 철원은 현무암 용암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 평강고원 오리산(452m)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넓고 긴 용암대지를 만들었다. 그 용암대지 위에 화산재가 쌓이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되었다. 흐르던 용암이 식으면서 수축해 좁고 긴 협곡을 만들었는데 한탄강이다.
궁예는 이곳을 도읍으로 삼고 후고구려를 건국해 천하통일을 꿈꾸었다. 이 궁예도성이 DMZ 안 남과 북에 걸쳐 있다. 광활한 농경지가 있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철원 인구는 3만 명을 헤아렸다. 철원평야 가운데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원선(서울-원산) 열차가 이곳을 지나갔고, 금강산 가는 열차를 갈아탈 수도 있었다.
해방과 함께 철원은 38도선 이북이어서 북한이 되었다. 철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북한은 이곳에 노동당사를 짓고 주민들을 통제했다.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이들은 반동으로 몰아 처형했다. 뼈대만 남은 철원노동당사는 공산당 치하에서 겪었을 수많은 이의 아픔을 품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넓디넓은 평야는 양보할 수 없는 땅이 되어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폭격이 있었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이어갔다. 전쟁통에 철원은 잿더미가 되었다. 3만 명이 살았던 도시는 몇몇 콘크리트 잔해로만 확인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들이 겪었을 수난이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노동당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철원제일감리교회터가 있다. 이 교회는 190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웰번에 의해 창립되었다. 1907년 선교지역 조정에 의해 강원도가 감리교 선교지가 되면서 감리교회로 바뀌었다. 당시 교회는 선교, 교육, 사회봉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또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한 결과, 1930년 성도 600명에 이르는 부흥을 보게 되었다. 이에 더 큰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1937년 확장 건축했다. 건평 655㎡(약 20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큰 교회였다. 교회문은 아치형으로 우아함을 갖추었고, 뾰족지붕은 조지아 고딕양식을 사용했다. 1층에는 1개의 소예배실과 분반 공부할 수 있는 공부실이 여러 개 있었다. 2층은 대예배실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우리 민족이 혹독한 고통에 내몰릴 때, 교회는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 불의에 저항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간교한 신사참배에 맞섰다. 35세 나이로 담임목사로 부임한 강종근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자!”라는 말씀을 선포했다. 일제는 강종근 목사를 체포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하고 고문을 자행했다. 구타와 고문으로 몸이 허약해진 강종근 목사는 1943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순교하고 말았다.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성도들은 순교의 정신으로 교회를 지켰다.
해방은 되었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민족 분단과 함께 공산 치하에서 더 혹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다. 교회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노동당사에 맞서 반공 투쟁을 전개했다. 한국전쟁으로 교회는 폐쇄되었고,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중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콘크리트 덩어리 흔적만 남은 철원제일교회는 200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잔해로 남은 교회 옆에 새로 지은 교회가 있다. 2013년에 준공하고 봉헌한 철원제일감리교회이다. 부서진 교회 잔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외부의 탄압과 폭력으로 무너진 교회는 다시 회복된다. 그러나 스스로 무너뜨린 교회는 재건되지 않는다. 교회 역사가 그랬다. 탄압이 가해질수록 교회는 더 단단해졌다. 그러나 국교로 대접받았을 때,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 시대 교회는 스스로 무너졌다. 솔로몬의 영화 뒤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을 떠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온누리교회, 문화해설사, <강화도(준엄한 배움의 길)> 저자)
궁예는 이곳을 도읍으로 삼고 후고구려를 건국해 천하통일을 꿈꾸었다. 이 궁예도성이 DMZ 안 남과 북에 걸쳐 있다. 광활한 농경지가 있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철원 인구는 3만 명을 헤아렸다. 철원평야 가운데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원선(서울-원산) 열차가 이곳을 지나갔고, 금강산 가는 열차를 갈아탈 수도 있었다.
해방과 함께 철원은 38도선 이북이어서 북한이 되었다. 철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북한은 이곳에 노동당사를 짓고 주민들을 통제했다.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이들은 반동으로 몰아 처형했다. 뼈대만 남은 철원노동당사는 공산당 치하에서 겪었을 수많은 이의 아픔을 품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넓디넓은 평야는 양보할 수 없는 땅이 되어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폭격이 있었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이어갔다. 전쟁통에 철원은 잿더미가 되었다. 3만 명이 살았던 도시는 몇몇 콘크리트 잔해로만 확인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들이 겪었을 수난이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노동당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철원제일감리교회터가 있다. 이 교회는 190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웰번에 의해 창립되었다. 1907년 선교지역 조정에 의해 강원도가 감리교 선교지가 되면서 감리교회로 바뀌었다. 당시 교회는 선교, 교육, 사회봉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또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한 결과, 1930년 성도 600명에 이르는 부흥을 보게 되었다. 이에 더 큰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1937년 확장 건축했다. 건평 655㎡(약 20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큰 교회였다. 교회문은 아치형으로 우아함을 갖추었고, 뾰족지붕은 조지아 고딕양식을 사용했다. 1층에는 1개의 소예배실과 분반 공부할 수 있는 공부실이 여러 개 있었다. 2층은 대예배실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우리 민족이 혹독한 고통에 내몰릴 때, 교회는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 불의에 저항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간교한 신사참배에 맞섰다. 35세 나이로 담임목사로 부임한 강종근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자!”라는 말씀을 선포했다. 일제는 강종근 목사를 체포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하고 고문을 자행했다. 구타와 고문으로 몸이 허약해진 강종근 목사는 1943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순교하고 말았다.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성도들은 순교의 정신으로 교회를 지켰다.
해방은 되었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민족 분단과 함께 공산 치하에서 더 혹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다. 교회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노동당사에 맞서 반공 투쟁을 전개했다. 한국전쟁으로 교회는 폐쇄되었고,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중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콘크리트 덩어리 흔적만 남은 철원제일교회는 200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잔해로 남은 교회 옆에 새로 지은 교회가 있다. 2013년에 준공하고 봉헌한 철원제일감리교회이다. 부서진 교회 잔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외부의 탄압과 폭력으로 무너진 교회는 다시 회복된다. 그러나 스스로 무너뜨린 교회는 재건되지 않는다. 교회 역사가 그랬다. 탄압이 가해질수록 교회는 더 단단해졌다. 그러나 국교로 대접받았을 때,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 시대 교회는 스스로 무너졌다. 솔로몬의 영화 뒤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을 떠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철원제일감리교회는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온누리교회, 문화해설사, <강화도(준엄한 배움의 길)> 저자)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