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
구름의 언덕 쿠사츠에서
“눈이 나빠져도 예쁜 안경을 맞추어 쓸 수 있고, 안경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도 감당할 수 있다니 감사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목사님계실 때 입던 옷들로 평생 입다가 갈 수도 있으니 감사하구나!”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너무 물질적인 생각과 궁여지책 뿐 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의식주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타인에게 신세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드는 것은 당연한 일 일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말씀을 통하여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잘 살아보라고 부탁하시고 계신다.
남편이신 하용조 목사님께서 옆에 계실 때도 목숨 걸고 매달려서 기도해 드리는 대신 ‘주의 종 이시니 직접 살려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분이 얼마나 내가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해 드리는 모습을 원하시며 기다리시다가 가셨을까 민망해 하면서 오늘밤도 마음의 창문을 닫는다.
지금에 와서도 그렇게 간절히 매달릴 기도 제목을 잘 모름으로 아직도 기도는 간단히 하며 지내는 편이다. 남편을 잃은 자의 간절함으로 그 분을 다시 만나 뵙고 싶은데, 꿈에라도 나타나 달라고 애원하란 말인가? 그 분이 가셨다는 사실이 절대로 나 자신이 선택한 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아실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도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 분과 나눈 지상의 시간들 속에서는 그랬던 기억이 별로 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따뜻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이해를 해주는 것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주는 따뜻한 둥지 안에서 거하고 있던 우리에게도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 와 있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혼자 지낸다. 혹시, 누군가 다가와서 이 사실을 상기라도 시켜 주신다면, 얼마나 냉혹한 얼음의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것인가?
더우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추우면 따뜻한 곳으로 피해 다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며 가방을 싸고 풀고는, 시끄러운 뉴스는 꺼 버리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 안에서는 원할 때 까지 앉아 있어도 되는 나의 시간들을 자유롭게 배열해 보곤 한다.
“누가 나에게 이러한 종류의 시간을 부여해 주셨을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는구나! 만물의 때를 아시는 주님의 눈에는 나도 그의 미비한 만물 중 하나였는가? 그의 특별하신 창조물이라는 자부심과 특권의식의 격하를 느끼며, 비천한 존재로 쓸어 담으심을 느끼는 한 과부로 전락해서, 주인의 뜻을 파악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약한 한 존재가 그의 발등상 밑에 엎드려져 있다. 다시는 물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무지개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지난해 필리핀을 쓸어 가시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쓰레받기가 참 크시고 강하시구나’하며 자신이라는 한 나라에 미친 자연의 재해를 묵상하며 지독한 현실을 피부로 느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작은 존재 안에도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고 간파 하리라는 가능성을 창조주께서는 아직도 보고 계신 것일까? 차라리 애초로와 하는 그의 눈빛을 직시 한 적이 있다면 내 마음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둥지 밖으로 떨어져 허둥대는 나를 보는 그의 생각이 무엇일까? 내가 자신을 작게 느껴 볼 수 있도록 망가뜨리실 때에는 땅콩 한 알이라도 반으로 잘라 놓으시는 능력을 발휘 하시는 분이시다. ‘만드신 분이 당신이시니 걷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 이십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구나…. 지난 해 그렇게 하기로 한 날에도, ‘우리 용조에게는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겠지!….’ 하면서, ‘하나님, 우리 용조 좀 잘 해 주세요.’ 하며 길을 걷다가 돌아왔다.
지난해 주선애 교수님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는 놀랐었다. 그는 남편이 돌아가시자마자 주님을 전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시며 오늘날 까지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 쿠사츠집에 오셨을 때 무릎 꿇고 예배드리시는 습관을 보여 주셨다. 90세가 되시도록 매일 무릎을 꿇으시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계시던 모습만으로도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주시기에 충분했다. 사람마다의 차이가 이렇게나 큰 것일까? 훈련의 성숙함과 미흡함의 차이가 이렇게도 나뉘어질 수 있을까? 하용조 목사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여종이시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무슨 생각이든지 써 내려 가기로 마음먹고 앉아 있다. 비록 체계가 있는 글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끝에 가면 어떤 결론에 이룰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독자들을 무지무지하게 지루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누구도 나의 묵상의 여로를 같이 걸어 가 주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언제든지 이 글을 읽는 것을 포기하셔도 섭섭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아니, 초장에 몇 글자라도 읽다 마신다면 그것만으로도 미리 감사드린다. 내가 굉장한 저자는 아니더라도 이 글을 내어 주시는 너그러운 분들을 가까이 하면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어느 출판사나 저자관리에 신경을 써 주신다. 나 같은 정도의 저자는 어떤 출판사에서도 허락 받기 힘들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책 한권을 내서 안 팔리면 얼마나 큰 손실을 보는지 아는가? 2년 전 써서 출판된 ‘쿠사츠의 봄’도 그런 경우였다. 독자들이 하도 안 읽어 주셔서 출판을 포기 하였었다. 너무나 제 소리만하고, 돌아가신 분의 사모답지 않게 믿음으로 화답하는 여유를 부리지 못해서란다. 혼자 된 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통해 하면서 감사도 안하고 자신을 고산지대로 격리 시켜버린 상태를 곱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남편을 용조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 맞지 않는 짓이라나?….
미안하지만, 더 잘 지낼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으려면 아직은 영적인 용기가 솟구쳐 올라오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먼 길을 떠나 다니는 짐 보따리가 얼마나 함축되어지고 작아 져야하는지 조금 전 까지도 터득하지 못한 체 돌아다니며 살았다. 이제는 어디가면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작은 지퍼 백 들이다. 종류와 용도별로 분류해서 주머니들로 채우고 다니면 트렁크 속을 다 뒤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트렁크 가득한 작은 백들 때문에 비서에게 구박을 받곤 한다. 이렇게 먼 길을 떠나 다니면서, 무거운 트렁크를 밀고 다니는 나의 모습이 탱크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한 달팽이의 고달픈 인생을 이해하며 다닐 때도 있다. 아무튼 이제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환경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한 곳에 머무르면서 글도 다시 쓰고 주변을 더욱 더 정리해서 하늘나라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리라. 요즈음 묵상하고 기도드리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는 편이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둬야 천국에 가면 어색하지 않을 것 같지 않을까? 걸어가며 그날의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성경말씀을 듣곤 한다. 과연 기도원이 되어간다. 공동체의 삶이 부재하다는 비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잘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느낀다. 능력도 없지만, 좋아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리워하는 친구도 별로 없다. 그렇다고 나의 친구는 오로지 나 자신뿐 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날까지 나 자신의 동반자가 되어 줄만한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필요가 변화될 때 환경도 따라 오지 않겠는가?
불란서에 있다는 떼제 공동체에 대한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몇 달 혼자 가서 지내다 올까 하는 생각도 깊이 해 보았지만 서양식 강의와 훈련 프로그램에 적응하고 싶지 않아서, 리더들의 이름들만 살펴 본 기억이 난다. 그 후 결정을 하지 않은 채 기도제목으로만 적어 놓고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어로 짧은 의사소통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힘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 영어로 말 하는 것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생긴다.
젊었을 때는 보리빵 한 개와 버터, 치즈 한 쪽과 사과 한 개, 물 한 병을 백팩에 넣고 다니면서도 아무 갈등이 없었다. 야채도 간간이 사 먹으며 생글생글 웃으면서 살았었다. 지금은 기숙사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줄을 서서 타가지고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신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 도 있는 그런 능력이 거의 없어 졌다. 그냥 혼자 먹고 싶은 대로 조금씩만 해서 먹으면 안 되나? 지난번에 엠트랙 기차를 탔을 때 식당칸의 좌석이 정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했었다. 왜 그렇게 웃으면서 자신들을 소개 하고 난 후 나에게도 자신을 소개해 보라는 기회를 주시는 것일까? 몇 끼니를 그냥 크래커와 물로 때우며 앉아 있다가 내린 생각이 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소란한 식당이 아니라 간단한 음식일 뿐이다. 좀 조용한 환경에서 한 끼니씩 먹고 마는 식생활이 얼마나 편해 졌는지 모른다. 용조와 나는 먹는 것에서 별로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었지만 서로의 건강에 맞추어 주려는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오순도순 지내던 나의 남편이 날아 가 버린 둥지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질 때가 식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혼자 지내며 먹고 사는 것 이외에 다른 노력을 할 만한 마음은 별로 없다. 사람의 생명이 지탱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란 말인가? 무엇을 꼭꼭 씹어 먹고 소화 시키는 본능이 인간에게는 질기다. 치사하다고나 할까.
나는 잔다. 나를 깨우지 말라. 내 잠자리가 얼마나 깨끗하고 예쁘게 정돈되어 있는지 보면 놀랄 것이다. 매일 밤, 기도드린다. ‘하나님, 내일 아침에는 천국에서 만나 뵈면 참 좋겠어요. 부탁 합니다’ 예쁘다고 생각되는 잠옷을 입고 자곤 한다. 이 지상의 마지막 모습이 예쁘기를 바라면서… 되도록이면 따듯해 보이는 잠옷을 골라 입곤 한다. 마지막에 추워하다가 갔을 지도 모른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자기 직전에 집을 치운다. 정돈을 깨끗이 해 놓고 모든 것을 잘 정리 해 놓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간다. 혹 누가 와서 흩트려 놓으면 자다 말고 나와서라도 치우고 잔다. 또한 저녁마다 빨래를 해서 얌전하게 널어놓고 잔다. 집안에 공기를 따듯하게 하려면 습도가 필요해 지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꽃병에 새 꽃들을 갈아서 꽂아놓는다. 혼자 사는 나를 존중해 주고 싶어서 말이다. 아주 작은 꽃병들이지만 한 가지씩 이라도 꽂아서 구석구석 놓아준다. 걷다가 보면 예쁜 들꽃이 시절을 따라 바뀌어 피고,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계절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별로 비싼 꽃은 사지도 않는 나를 반겨주는 꽃 가게 주인이 뛰어 나오며 웃어 주는 것을 나는 은근히 좋아한다. 지난번 아주 이른 봄부터 값 비싸고 귀한 작약꽃과 함박꽃을 팔기에 사 준 적도 있었으니까…. 도대체 어디서 구해 온 꽃들이었을까?
우리집 길 동네에 있는 한 레스토랑을 돌아가자면 큼직한 박하향의 허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는 어김없이 몇 입새를 뜯어서 코에다 대곤 심호흡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봉지처럼 생긴 가방 속으로 코스모스, 다알리다아, 분꽃, 샤르비야, 빨간 열매, 단풍잎….수도 없이 많은 들풀을 꺾어 담아 가지고, 시들도록 걷다가 집에 와서는 물에 담가 놓았다가 병에 꽂아 놓는다. 걔들은 오래 못가서 시들어 버리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버섯과 야채들, 치즈와 곡식 등을 사서 박스에 담은 후, 비서가 미리 써서 준비 해 준 주소 스티커를 한 장 부쳐 놓고 걸어서 올라오면 프론트를 지나기도 전에 벌써 배달이 되어 있다고 알려준다. 차가 필요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디든지 걸어 다니면 되니까 말이다. ‘저 여자는 직업이 걷는 것인 가봐!’ 하고 수군대는 것 같은 느낌이 뒤통수를 치는 날에는 일층 프론트를 사용하지 않고, B1지하실로 나가서 빌딩을 반 바퀴 더 돌아 동네 어귀로 나가 버리곤 한다. 사람끼리 부대끼는 일은 없도록 자신을 도와주며 살고 있다. 그들은 이 외지에서 온 여자가 왜 혼자 사는지 알고 싶어 한다. 하용조씨 덕분에 조금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분 덕분에 말이다. “고맙지 뭐…. 진심으로…. 누가 나를 이렇게 쉬게 해 주실 수 있겠나!? 그것도 죽을 때 까지나! 그분은 내가 좀 쉬면 무지 조심해 주셨었지” 이런 생각을 다 하곤 한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은퇴를 하게 되면 왜 그렇게들 당황을 하는가? 시골에서 지내면 될 것을…. 그것도 적응을 못해서 갑자기 늙어버릴 수도 있으니 따라하시기는 마시기를 바란다.
이런 내게도 도전이라는 것이 있었다. 원 코인(one coin bus) 버스는 동네버스이다. 백앤 짜리 동전 하나로 미니버스를 타면 동네 어디든지 데려다 준다. 삿포로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콘을 하나 들고 앉아 편하게 동네를 구경하며 드라이브를 하곤 하는 데 자동차가 없는 나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된다. 택시를 타고 다니며 드라이브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A, B, C 세 가지 코스중 하나를 택하여 타라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중간에 내릴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바퀴만 돌고 와서 종점에서 내려서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온천에 들렸다가 올 때도 있지만…..
그런데 B코스를 타게 된 어느 날 오후, 숲속 작은 길을 지나다가 제법 큰 도로로 나가자 노란 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카페 같이 보여서 커피나 한 잔 마시고 가려고 일단은 내렸다. 향은 그래도 어느 정도 내어서 잘 만든 커피는 파는데…. 누구를 위하여 그런 장사를 시작한 것인지 의아해 하며 나와서 조금 길게 걸어가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차도가 있었기에 조심을 하며 숲속을 드려다 보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대나무 숲 밑으로 흐르는 하얀 개울물이 바위들을 가르며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용조, 물 좀 봐!, 당신도 좋지?” 나는 조심스럽게 가드레일을 넘어서 대나무 뿌리 마다 발을 옮겨가며 한 발자국씩 밑으로, 더 밑으로 내려갔다. 투명한 우윳빛 물결들이 하얗게 바위틈을 튀어 다니며 흐르는데 나도 모르게 신발을 신은 체 발을 담구고 있었다.
너무나도 얼음 같이 차가운 물 때문에 체온이 내리고 심장이 쪼그라지는 것을 느꼈지만 발을 꺼내기가 아까워서 가만히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를 깨워 준 것은 작은 알맹이를 뿌리 던 빗방울들이 내 눈물방울 보다 진하고, 두꺼워 졌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무엇인가를 움직이며, 날아다 쌓고 있는 작은 개울 돌로 만든 성벽이
너무나 높아져서 물의 줄기마저 돌려놓고 있었다.
“그래, 여보, 나를 집에서 벽지나 고르고 나물이나 무치는 그런 여자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 기억 잘 해보라구! 내가 그렇게 시시하게 보였단 말이지?”
“나를 얼마나 무시하고 우습게 생각 했으면 그냥 가 버렸냐구????”
나는 정말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 이것 좀 보라구, 내가 토목 공사를 해서 물길도 바꾼 거 봐!”
“당신이 내 옆에만 있었다면 얼마나 잘 해 주고 싶은 줄 알아?”
“내 몸이 지금 너무 차가워서 곧 죽을 것 같다구! 그래도 계속 당신을 위해서 뚝을 쌓아 올릴 수 있는 나를 좀 보라구요. 이 바보야!,,,, 내 숨소리를 들어봐! 나라고 씩씩 거릴 수 도 없는 줄 알았지??”
그래 알았어, 이제 그만 할게. 저 뚝은 당신이 가져. 저 속에 내 죄가 하나씩 쌓여 있거든… 당신을 못 잊는 죄들 말야. 그래, 여보. 당신을 그리워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내 모성애, 그 부서지지 않는 이 빈 손들을 저 돌담 속에다 넣어 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눈을 뜰 용기를 내지 못했다. 빗물이 불어서 더 세어진 계곡물소리가 가여워서, 좁아진 물길을 조금 터주고 떠나며 흐르던 뜨거운 눈물이 차가워진 나의 뺨을 데워주고 있었다. 얼마 가 지났을까… 어두움이 진하게 내려앉은 후 나는 발길을 돌렸다.
어두워진 발 위로, 발 아래로 흐르는 묽어진 진흙이 나를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한테 화가 난 것 아냐? 그래 화라도 내 주면 고맙지.” 길로 올라오자 나는 걷기 시작했다. B 코스의 작은 버스가 다시 와 주는 지는 나의 관심 밖에 있었다. 사실 돌아와서 다시 나를 태워 준다고 한들 그 젖은 옷으로 올라 텄겠는가? 동전지갑도 귀찮아 져서 바위틈에 살짝 버리고 올라 온 길이 었는데…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길은 멀고도 멀구나… 다리가 꺾여서 죽는구나 생각하며. 한걸음, 한걸음씩 발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기진맥진 하면서도 온천으로 그냥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호주머니 속에서 아프게 콕콕 찌르며 따라 오던 현관 열쇄에다가 그렇게나 깊은 우정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잠들기 전, 머리 숙여 무언가에 대하여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여보, 약 먹구자! 부탁한다, Dalleen” 한다.
무엇에 감지덕지 해져서 즉각 순종하는 모드로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약이란 약은 종류 별로 하나씩 입에 털어 넣고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정동진의 찬란한 태양빛이 눈을 뜨게 하였다.
“아! 비서가 올 시간인데!” 눈을 뜨자마자 전화를 해 보았다.
“사모님, 저 지금 동경에 있어요. 오후에 늦게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밤이니까 내일 아침에 뵈요”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하루 왼 종일 가만히 누워있었다. 먹으라고 부탁하신 약을 한 세트 더 털어 넣고는 말이다.
그 후에도 나는 B코스 버스가 주는 도전을 순하게 받아드리고 있다. 비서와 함께 시립공원에서 내려서 어두운 나무다리 위를 출렁 거리며 숲속을 빠져나오고 나면 작렬하는 태양 빛을 받으며 골프장 길목까지 이어지는 밤나무골이 나온다. 작지만 알이 가득 찬 밤송이들 속에서 날 밤들을 집어내느라고 땀이 나도록 몸을 굽혔다. 백팩에 가득 든 밤이 한 말은 되었을 것이다. 너무 더워서 스웨터를 벗고 걷는 나의 모습을 비서가 부끄러워한다. 너무 많이 노출 된 속 스웨터가 지나가는 차들에게는 실례라는 표정이시다. 나는 그냥 마구 웃으면서 B코스에 의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네가 지난번 내가 개울로 내려 갔 던 일을 알기나 한 단 말이야?” 속으로 웃으면서 말이다
나의 일상생활을 성도님들께 들려주고 싶어서 써 놓았던 글 중에서 한 꼭지를 꺼내 보았다. 소위 말하자면 ‘쿠사츠의 여름’이라는 책에 있는 chapter 4중에서 나오는 글의 한 부분이다.
하용조 목사님의 소천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경험 한 분들이 오직 나 한명 뿐이겠는가 생각 해 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곧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제야 실컷 울다가 세수를 한 기분으로 개울가에 앉아 있다. 현실을 바라보며 적응하라는 설교도 그의 가르침이 아니었겠는가? 과거지사는 과거지사이고 현실은 또 현실 이니까??? ‘이렇게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보면 나도 언젠가는 저들 같이 될거야’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감사하다. 구름이 머물다가 쉬어가는 곳, 무성한 수림이 단풍이 되고, 앙상한 가장구들과 씨름 할 수 있는 곳, 눈보라 휘날리며 발을 담구는 곳, 함박눈 속에 파묻힌 동백꽃 속에서 온천하는 곳, 봄이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이렇게 큰 소리로 말이다. 늦게 피는 벚꽃으로 듬성듬성 산등성이를 수놓을 때는 벌써 초여름 이라는 것이 신기해 진다. 천 개의 실과 같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하얀실의 폭포를 보고 있으면 용조의 웃음소리가 크게도 들린다. 알프스도 안데스도 아닌 것이 이곳 군마현의 백근산이다. 산의 정상에 서면 에메랄드빛으로 깊어진 아름다운 호수와도 만나게 된다.
3년 동안이나 더운 날, 8월 2일날, 하 목사님의 묘소가 있는 양지 비전빌리지에 오시느라고 애를 써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내년부터는, 하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는 8월 2일이 끼어있는 주의 수요저녁예배 때에 모여서 드려주시면 감사하겠다. 물론 우리 가족들은 그곳에 자주 찾아뵙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오겠지만, 온누리교회로서는 그동안 너무나도 애를 써 주셨고, 또 때로는 개인적으로 묘소를 찾아 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개인적으로 묘소에 들르실 수 있다면 8월에는 너무 덥고, 9월 10월에 계획 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11,12,1,2,3,월은 너무 춥다. 물론 우리 가족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지만…. 사실 아빠의 유골을 조금씩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아름다운 곳에 갈 때는 모시고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한다. 그의 사진들을 가지고 다니다가 홀로 있을 때 꺼내어 서로 보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무서울 때는 그가 사랑하던 유품들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기도 한다.
그냥 철없는 한 과부의 소원이니 어리석다고 생각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이런 일이 교회의 결정이라면 얼마나 또 이견과 갈등이 생겼겠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시간이 없다. 교회는 하 목사님의 비전을 생각하며 달려가고 있다. 열성을 다 해서 주님을 섬기시는 겸손으로, 성숙한 교회의 모습으로써 한국교회의 희망과 모델이 되어 주신 온누리교회와 성도님만 생각해도 하 목사님과 우리 가족은 감사드리며 눈물겨워 하고 있다. 아빠가 다 이루지 못하고 가신 비전은 무덤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 하용조 목사님의 그림자를 섬기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 하면서 선교도 하고, 전도에도 열심히 힘을 쏟으면서 사시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온누리교회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지으시는 하용조 목사님 선교 기념관이 완성되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 나올까? 그 때가 되면 우리 모두 함께 가서 기뻐하며 축복 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던 바로 그 교회의 선교와 비전의 역사적인 현장이 될 것이다. 선교사를 지망하고 훈련 받는 비전빌리지에 바로 그러한 건조물이 세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정확하시고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건인가? 온누리교회와 한국교회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드릴 때,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할 때는 꼭 찾아가서 기도하며 금식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쓰여 질 곳이 드디어 우리 온누리교회에게도 생긴 것이다. 온누리교회에는 비전빌리지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버스가 있다. 친구들과 모여서 소풍삼아 가보면 밥도 사 먹을 수 있으니까 가서 기도드리는 삶을 정규적으로 계획 할 수도 있다. 설계를 맡아주신 아론 탄과 헌신해 주신 장로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 하용조 목사 사모 이형기드림
작성자 조은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