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전문가 기고
‘여기, 이 자리’를 감사하는 믿음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현재의 내 자리가, 가시방석 같고 싫기만 한 여기 내 자리가, 알고 보니 둘도 없는 꽃자리라고 말하는 시(구상, ‘꽃자리’)가 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너무 싫어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저 자리’로 옮겨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고, 저 자리가 마냥 부럽기만 할 때가 있다. 우리는 당면한 고통에 직면하고 싶지 않을 때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찾거나 도망가려고 한다. 
 
불안 유형과 방어기제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1926년 책 <억압, 증상과 불안>을 통해 자아가 불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을 때는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거부하고 왜곡하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자아가 느끼는 불안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현실 불안(reality anxiety)이다. 실제 외부 세계에서 받는 위협이나 위험에 대한 인식으로 느끼는 불안으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불안을 의미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넘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현실 불안이다. 
둘째, 신경증적 불안(neurotic anxiety)이다. 실제로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본능적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껴서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신경증적 불안은 원초아(성격 중에서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인 요소)의 쾌락이 자아를 전복시킬 것 같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셋째, 도덕적 불안(moral anxiety)이다. 초자아(프로이트의 성격 구조에서 마지막으로 발달하는 체계, 사회규범과 기준이 내면화된 것을 말함)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해 처벌받을 거라는 불안으로 자기 양심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의 도덕적 원칙에 위배되는 원초아의 충동이 일어나면 초자아는 수치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불안을 느끼게 되면 우리의 자아는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심리적 방패를 꺼내드는데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방어기제는 전적으로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대처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의 문제를 피하려는 삶의 양식으로 굳어지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사용하게 되는 방어기제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억압(Repression)이다. 고통스럽거나 위협적인 경험, 생각, 감정 등을 의식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욕구나 충동, 생각을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감춰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나 경험을 완전하게 억압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억압된 욕망이 종종 꿈, 농담, 말실수 등으로 간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억압된 내용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어서 현재 행동의 동기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억압은 모든 방어기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부인(또는 거부, 부정, Denial)이다. 힘든 현실의 외상적 상황을 무시함으로써 불유쾌한 현실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의식화된다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생각, 욕구, 충동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비극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현실에 대해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리게 된다.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암이 아니고 의사의 오진이라고 주장하거나, 애인이 자신을 버렸는데도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한 내담자는 여러 명의 누나가 있는 집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홀로 어렵사리 자녀들을 키워왔다. 내담자가 일류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어느 날, 어머니가 병에 걸렸고 수술을 했지만 임종을 맞이하게 됐다. 마지막 순간이 되어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고 싶다고 간절히 불렀지만 아들은 끝까지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임종하셨고 장례를 치렀다. 아들은 중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전히 살아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자신의 한쪽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어머니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투사(Projection)는 자기 스스로 혹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충동이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전가하는 것이다. 자신의 결점을 타인이나 환경 탓으로 돌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결함이나 약점 때문에 갖게 되는 위협이나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성적(性的)이거나 공격적인 충동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수용될 수 없는 욕망을 인식하거나 다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윤리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서 “몇 학년 몇 반 그 여학생 도무지 못쓰겠다”고 화를 냈다. 짧은 치마를 입고서 자기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질 나쁜 학생이라고 비난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여학생에게 성적 충동을 느꼈고, 평생을 윤리 교사로 엄격하게 살아온 자신이 그런 충동을 느꼈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재를 지나지 않고는 
영광을 경험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질환이나 심리적 장애는 눈앞에 직면한 고통을 피하려고 다른 것에 의존할 때 그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괴로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결국 알코올 중독이 더 큰 문제가 되어 삶을 파괴하는 경우를 봐도 그렇고, 앞서 예를 들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부인했던 외아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는 슬픔과 고통은 피했지만 그 결과로 현실에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립돼 외로운 삶을 사는 더 큰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예수님께서는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피하고 싶은 자리였지만 그 자리를 감당해내셨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보다 죽음 가운데 있을 때 더 큰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고통의 불 가운데를 지나고 나면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주님의 여러 모습을 알게 된다. 공급자 되시는 주님, 위로자 되시는 주님, 치유자 되시는 주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시는 주님,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의 자리를 억압하고, 부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않고,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직면할 때 체험하게 되는 은혜이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어떤 것을 계속 가지고 있었더라면 혹은 어떤 사람이 여전히 내 인생에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주님의 모습이 그 어떤 것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고,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갔을 때 그제야 내 안으로 들어오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깨끗케 하고, 나를 세우고,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으로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영광은 원하지만 재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쁨은 원하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한 마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찬양의 옷을 입을 수 없다. 재를 지나지 않고는 영광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져버린 것들 때문에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남은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전에 저지른 실수와 죄, 예전에 일어난 안 좋은 일과 과거로부터 깨끗하게 씻겨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은 과거의 것, 죽은 것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죽은 과거로 인한 자기 정죄를 버리고, 눈을 들어 앞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에 살기가 쉬운 것 같다. “내가 더 열심히 했다면 직장을 잃지 않았을 거야”, “내가 더 노력했다면 이혼하지 않았을 거야” 모두 지난 일이다. 이제 과거를 보혈로 덮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 자녀의 삶은 뒤(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음을 다시 기억하기 바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 하혜숙 교수(한국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과, 강동 온누리교회)
 
 
<발문>
과거를 보혈로 덮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 자녀의 삶은 뒤(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음을 다시 기억하기 바란다.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