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산드로 보티첼리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명화(名畫)와 함께 읽는 성경
 
“너희는 잠들지 말라 깨어나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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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이 기도할 때 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덴마크의 한 대학 뇌과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이들은 루터교회의 독실한 크리스천 20명을 대상으로 네 종류의 글을 읽고 기도를 해보라고 한 다음 각자의 뇌를 f-MRI(기능적 자기공명 영상장치)로 스캔했다. 그들이 읽은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형화된 기도문(주기도문 등), 정형화되었지만 비종교적인 기도문(자장가 등), 즉흥적이면서 종교적인 기도문(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대화 등), 즉흥적이지만 비종교적인 기도문(산타클로스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내용 등)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형화된 기도가 아니라 즉흥적 기도를 할 때만 측면대상피질의 앞부분 측두엽과 두정엽이 활성화됐다. 이 부위는 대화를 할 때 활성화된다. 따라서 이 실험결과는 교인들이 기도를 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 하나님을 상정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말씀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하고 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 그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눅 3:22)는 소리가 들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기 전에도 기도하셨다. 변화산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거룩한 변모를 하실 때에도 기도하셨다. 그때도 세례 받으실 때처럼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는 말씀이 들렸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 전에도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눅 23:34),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빌라도가 보낸 병사들에게 체포되기 전날 밤에도 당신이 어려울 때마다 와서 기도하고 묵상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절박함’과 제자들의 ‘무신경’ 
 
오늘 묵상할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26장 36절에서 46절 말씀이다. 인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번민과 고뇌 속에서 괴로워하셨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 때 데리고 갔던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다시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 번이나 어겼다. 육화하신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가는 경각에서도 그들은 기도하기는커녕 단잠에 빠져 허우적댄 것이다. 
엘 그레코, 파울로 베로네세, 안드레아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 아리 셰페르 등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화가는 많다. 그 중에서 아리 셰페르가 그린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어린 기도’는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님과 그를 위로하는 천사의 모습을 절절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오늘 말씀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1520년 경)이다. 보티첼리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겟세마네는 예언자 에스겔과 스가랴가 하나님의 법을 세우기 위해서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메시아의 환상을 본 곳이다. 환상에서 보인 신전에서의 메시아는 위대한 영웅의 모습이다. 반면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인, 비극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보티첼리가 묘사하는 겟세마네 동산은 사건의 비극성과는 무관하게 연극 무대처럼 작위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면은 있다. 
그러나 “깨어나 기도하라!”고 재삼재사 말씀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잊고 잠에 빠진 세 제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실감나게 그려냈다. 아마도 한 연배 위의 선배 화가 만테냐와 벨리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곳과 제자들이 잠든 곳 윗부분을 날카롭게 깎아낸 나무 울타리를 쳐서 구분했다. 이로써 처절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긴박함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제자들의 무신경을 뚜렷하게 대비시킨다. 뾰족한 나무 울타리는 극도로 예민해진 예수님의 마음을 상징하기도 하고, 곧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의 원형’
 
기독교에서 잔(盞)은 복합적인 상징을 가진다.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시도다”(시 116:3). 이처럼 시편에서의 잔은 ‘축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너 여호와의 손에서 분노의 잔을 받아 마신 예루살렘아”(사 51:17),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 14:10)는 말씀에서의 잔은 하나님의 ‘분노와 파멸’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장에서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도 포도주를 권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
최후의 만찬에서의 잔은 사람들의 ‘구속과 영생’을 상징하는 잔이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원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에게 다가올 ‘운명과 수난’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1:22).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기도 중에 자신의 때가 왔음을 아셨다. 인간의 몸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무서운 고통과 수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다른 화가들은 엎드려 간구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천사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러나 보티첼리는 예수님이 기도를 끝냈을 때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의 손을 잡고 직접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화가들이 많이 그린 예수님을 체포하러 오는 병사들의 모습도 생략했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가졌던 예수님. 신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알지만 인간의 몸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 앞에서 두려움의 피땀(血汗)을 흘리는 예수님을 하늘 아버지는 천사를 보내 위로하셨다. 보티첼리는 양팔을 가슴으로 모으고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천사의 위로를 받는 예수님의 겸손한 자세를 잘 그려내고 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의 원형(archetype)’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잠들지 말라. 깨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실존적 두려움을 외면하고 잠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오로지 제 문제에만 빠져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도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잠들어서는 안 된다. 깨어 일어나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겠다. 깨어있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계 16:15).
우리는 늘 깨어 일어나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이웃을 위해서!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일.하.세. 아카데미 강사)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