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조토 디 본도네의 ‘예수 탄생’에 담긴 의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자 바삐 잰걸음을 걷다가도 거리에 성탄을 축하하는 캐럴이 나오면 잠시 멈추고 경건해지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도통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수 없다. 엄격해진 저작권법이 가장 큰 원인이고,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더불어 우리 사회 일각의 반기독교적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희망컨대 기독교계가 다 함께 힘을 뭉쳐 저작권 문제라도 먼저 풀었으면 좋겠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크리스마스 캐럴이 없는 연말은 너무 밋밋하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애국가를 4절까지 온전하게 외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도 상황은 비슷하지 싶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이 찬양의 4절은 이렇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뜬금없이 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들먹이냐고? 이 노래가 누가복음 2장 8~20절까지의 핵심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 로마황제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대적인 호구조사를 명령한다. 이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들이 살던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이때 마리아는 만삭이었다. 해산을 앞둔 마리아와 요셉은 고향 땅에서 끝내 여관방을 구하지 못하고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았다. 
 
세상을 구원할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 될 메시아의 탄생
 
오늘 이 말씀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년)가 그린 ‘예수 탄생’(1304년)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소장되어 있다. 화가 조토는 13세기 말 이탈리아 미술의 신기원을 연 사람이다. 그는 원근법과 중첩 등을 활용해 평면적인 중세 회화에 입체감과 생동감을 불어넣은 선구자였다. 
조토의 그림을 한번 보자. 한밤중에 어두컴컴한 외양간 한켠 구유에 포대기로 싸여 누워있는 이가 바로 아기 예수님이다. 외양간의 소와 나귀가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보는 나귀는 겸손과 소박함의 상징이다. 이집트로 피신할 때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타고 간 것도 나귀였고(마 2:1~18),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탄 것도 나귀였다. “보라 너희 왕이 너희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마 21:5).
소는 구약 이사야서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황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알지 못하는구나”(사 1:3). 
소나 나귀와 같은 비천한 존재도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알아보는데, 너희 교만한 인간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질타가 담겨있는 듯하다. 
여기서 육신의 아들이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기뻐하기는커녕 구유 아래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아기 예수와 등을 지고 있는 요셉의 모습이 눈에 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이들 부부의 침울한 표정은 아기 예수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포대기와 관련이 있다. 조토가 묘사한 포대기를 보라. 죽은 이가 입는 수의(壽衣)처럼 보인다. 메시아의 탄생을 경축해도 모자랄 판에 수의가 웬 말인가? 이것은 태어나자마자 세상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예수님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한 요셉과 마리아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의는 십자가와 동일한 상징물이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는 구유가 나무관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예수님이 태어난 때는 한밤중이다. 밤은 ‘무지와 죄악’을 상징한다. 밤은 ‘그리스도의 부재’를 상징한다.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의 몸은 광채로 빛난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라는 캐럴 가사처럼 그리스도는 한밤중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다. 콜린 스미스는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 가운데로 인도하는 왕이 되셨다”고 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어둠이 물러가고, 복음의 빛으로 충만한 신약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조토의 그림 위쪽과 오른쪽은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하늘에서 나타나 들판의 목동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 순간 ‘노엘’이라는 캐럴의 가사처럼, 저 들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주 나신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12).
천군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본 것이 미천한 소와 나귀였던 것처럼 세상을 구원할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 될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세상에서 처음 들은 이는 천대받던 목동들이었다. 유대인 최고 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들을 수 없고, 계층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 있는 양치기만이 예수 탄생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목동들은 자신의 에고(ego)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고 겸허하게 복된 소식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상징한다. 목동들은 천사가 말해준 것을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놓인 아기를 찾아서”(눅 2:16) 전한다. 최초의 복음 경청자들이 최초의 복음 전파자가 되는 순간이다. 
천군천사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한다. 그러나 그 평화는 무조건적인 평화가 아니다. 조건부의 평화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만 평화가 선포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한 신학자의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자기는 물론 주변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 사람들에게 기쁨에 겨워 온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복음을 경청하고, 그것을 듣자마자 빨리 전하는 목동들 같이 겸허한 사람들이라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마음의 외양간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더러운 말구유에 친히 누우셨다. 17세기 독일 시인 안셀루스 실레시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천 번을 태어났어도 네 안에서 태어날 수 없다면 너는 영원히 몰락할 것이다.”
융심리학자 안셀름 그륀은 이 시를 이렇게 풀이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외양간에서 새로 태어나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외양간에서, 나의 내적 혼돈 속에서, 나의 어둠 속에서 새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새로 태어나시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새롭게 되고, 나는 내 과거에 구속되지 않는다. 나는 충만한 삶에 대한 오래된 꿈을 꾸어볼 엄두를 내보기도 한다.”
그렇다. 베들레헴 어두운 외양간에서 태어나 세상을 밝히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번 성탄절에는 내 마음의 외양간에서 다시 태어나실 것이다. 내 마음속 어두움과 내적 혼돈을 몰아내주실 것이다. 그날에는 조토의 그림처럼 목동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을 축복해주었던 천군천사들이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일.하.세. 아카데미 강사)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