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완벽한 결혼은 없다 건강한 결혼만 있다!
특별기고
완벽한 결혼은 없다 건강한 결혼만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그 거룩한 부르심에 대하여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 2:18).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좋지 않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짝을 만드셨다.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만들기 위해 결혼제도를 만드셨다. 그런데 역사와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간다. 1970년대 미국 인류사회학자 마가렛 미드는 “50년 내에 가족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극단적인 의견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결혼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한다. 지난 100년 동안 이혼율이 7배 늘었으며, 미국 어느 지역의 이혼율은 무려 50%나 된다. 이혼뿐만 아니라 만혼(晩婚)과 1인 가구율도 이미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이혼문제는 당사자의 후유증뿐 아니라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정체성 혼란, 애정 결핍 등이 발생할 수 있어 결국 사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애당초 왜 결혼했을까? 이혼자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조사는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답이 압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끌림을 느끼면서 만나고, 만남이 반복되면서 결혼해서 같이 살기로 합의한다. 그런데 결혼식장의 어느 주례도 서로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좋지 않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짝을 만드셨다. ‘좋지 않음’을 ‘좋음’으로 만들기 위해 결혼제도를 만드셨다. 그런데 역사와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간다. 1970년대 미국 인류사회학자 마가렛 미드는 “50년 내에 가족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극단적인 의견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결혼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한다. 지난 100년 동안 이혼율이 7배 늘었으며, 미국 어느 지역의 이혼율은 무려 50%나 된다. 이혼뿐만 아니라 만혼(晩婚)과 1인 가구율도 이미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이혼문제는 당사자의 후유증뿐 아니라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정체성 혼란, 애정 결핍 등이 발생할 수 있어 결국 사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애당초 왜 결혼했을까? 이혼자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조사는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답이 압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끌림을 느끼면서 만나고, 만남이 반복되면서 결혼해서 같이 살기로 합의한다. 그런데 결혼식장의 어느 주례도 서로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결혼은 서약(誓約)이다
결혼식에서 우리는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사랑하겠다”고 서약한다.
서약(誓約)이란 맹세가 있는 약속이란 뜻이다. 서약의 원형은 아브람과 하나님의 언약식 즉,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창세기 15장 17절의 모습이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취소할 수도 있는 점심약속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결혼은 내일 변할 상황에 상관없이 사랑하겠다고 엄숙하게 계약 맺는 일이다. 여기서는 너무 무거운 느낌의 서약이라는 단어 대신 약속으로 대신하겠다. 누구와의 약속인가? 두 가지다.
첫째, 주권자이신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고 배우자로 불러주셨음에 순종해서 하나님과 하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이브를 데려왔을 때, 아담은 감격하며 순종했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모든 상황을 만드셨다. 아담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일부였다. 만남은 신적 개입사건이다. 과거 동양 문화권에서도 만남과 결혼을 거의 신적 인연으로 보았다. 지금도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의 정혼(어릴 때 결혼상대를 정해놓는 제도)에는 이혼이 없다는 사실은 문명사회가 생각해볼 일이다. ‘결혼이 절대주권자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신념은 사실상 결혼관계에서 생기는 거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 준다. 부부 갈등에서도 배우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이 먼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은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다. 만일 “살아보니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하나님이 내 기준에 못 미치는 배우자를 주셨다”고 생각하고, 결혼생활이 고통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먼저 물어야 한다. 부부갈등 해결의 최선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 묻는 일이다. 하나님께 반복해서 묻다 보면 묻는 사람이 깨닫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배우자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묻는 사람은 어느덧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배우자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게 된다. 영향 받는 사람에서 영향 주는 사람으로 변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자각증상 없는 교만과 뿌리 깊은 탐욕이 있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원하는 것만 주장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신다. 필요한 것이 고통스러운 수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술은 사랑이고 축복이며 감사할 일이다.
둘째, 결혼 당사자 간의 약속이며 계약이다. 계약이란 상호적이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다. 일단 계약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결혼이라는 계약 성립 이후에는 배우자와 상관없이 혼자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계약위반이나 마찬가지이다. 결혼계약 관계에서 대화하며 한 몸으로서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결혼 이후에는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이익’이 ‘부부 공동의 이익’으로 바뀐다. 마치 신앙인으로 거듭나면 내가 추구했던 모든 즐거움을 버리고, 모든 가치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재정립되는 것과 같다. 결혼하면 묶인다고 생각해서 결혼 자체를 피하는 청년들도 많아졌다. 결혼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서약(誓約)이란 맹세가 있는 약속이란 뜻이다. 서약의 원형은 아브람과 하나님의 언약식 즉,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창세기 15장 17절의 모습이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취소할 수도 있는 점심약속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결혼은 내일 변할 상황에 상관없이 사랑하겠다고 엄숙하게 계약 맺는 일이다. 여기서는 너무 무거운 느낌의 서약이라는 단어 대신 약속으로 대신하겠다. 누구와의 약속인가? 두 가지다.
첫째, 주권자이신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고 배우자로 불러주셨음에 순종해서 하나님과 하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이브를 데려왔을 때, 아담은 감격하며 순종했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모든 상황을 만드셨다. 아담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일부였다. 만남은 신적 개입사건이다. 과거 동양 문화권에서도 만남과 결혼을 거의 신적 인연으로 보았다. 지금도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의 정혼(어릴 때 결혼상대를 정해놓는 제도)에는 이혼이 없다는 사실은 문명사회가 생각해볼 일이다. ‘결혼이 절대주권자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신념은 사실상 결혼관계에서 생기는 거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 준다. 부부 갈등에서도 배우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이 먼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은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다. 만일 “살아보니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하나님이 내 기준에 못 미치는 배우자를 주셨다”고 생각하고, 결혼생활이 고통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먼저 물어야 한다. 부부갈등 해결의 최선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 묻는 일이다. 하나님께 반복해서 묻다 보면 묻는 사람이 깨닫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배우자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묻는 사람은 어느덧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배우자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게 된다. 영향 받는 사람에서 영향 주는 사람으로 변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자각증상 없는 교만과 뿌리 깊은 탐욕이 있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원하는 것만 주장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신다. 필요한 것이 고통스러운 수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술은 사랑이고 축복이며 감사할 일이다.
둘째, 결혼 당사자 간의 약속이며 계약이다. 계약이란 상호적이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다. 일단 계약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결혼이라는 계약 성립 이후에는 배우자와 상관없이 혼자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계약위반이나 마찬가지이다. 결혼계약 관계에서 대화하며 한 몸으로서의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결혼 이후에는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이익’이 ‘부부 공동의 이익’으로 바뀐다. 마치 신앙인으로 거듭나면 내가 추구했던 모든 즐거움을 버리고, 모든 가치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재정립되는 것과 같다. 결혼하면 묶인다고 생각해서 결혼 자체를 피하는 청년들도 많아졌다. 결혼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결혼은 용서와 사랑을 배우는 장(場)이다. 결혼을 통해 사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롬 3:19).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엡 2:3). 그러나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 변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며 ‘인자’가 과연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봐주십니까”(시 8:4)라는 말씀은 사람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사람’은 ‘에노쉬’ 즉, 연약한 인간, 죄짓기 쉬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배우자를 이 시각으로 보면 형편없다. 가정불화와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언급되는 ‘인자’는 ‘벤 아담’(아담의 자손, 사람의 아들)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타락 전의 인간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는 ‘생명을 주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된다. 연약하여 실수하는 인간은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회복된다. 그래서 모두가 연약하지만 가능성이 있다.
결혼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기쁨과 신선한 소망을 준다.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 이런 말이 있다. “아내가 없는 사람은 선함도, 도움도, 기쁨도, 축복도, 용서받음도, 웰빙도 없다.”
같이 살면 혼자 살 때보다 불편하다? 맞다. 그러나 그 불편을 상쇄하고도 넘칠만한 기쁨과 안정감, 평안과 소망, 위로가 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창세기에 남자 창조는 한 절이고, 여자 창조는 여섯 절이다. 여자는 돕는 배필이다. 도움이란 힘이 더 센 쪽에서 베푸는 것이다. 남자는 지어졌고(히브리어 -yatzsar, 영어-form), 여자는 만들어졌다(히브리어 -babag, 영어-build). 하나님은 결혼생활에서 다름을 경험하고 알아가며 새로운 세계를 살게 하셨다.
만남은 허물 많은 인간, 에노쉬들의 만남이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다른 점들을 이해하는 과정이 소중하다. 부부뿐 아니라 교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조화롭게 된다. 부부는 이해와 용납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친밀감은 육체를 넘어서 영적인 관계까지 포함한다. 거기서 진정한 통합인 한 몸 됨이 이뤄진다.
결혼 전에 보이지 않았던 다른 점들이 결혼 후에 드러난다. 한때 둘이 나누었던 낭만과 에로스보다 바쁜 일과가 우선된다. 좋아했던 감정은 영원할 것 같지만 변한다. 이기심이 부딪힌다.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에로스’는 주어(내 기쁨, 내 만족)가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 사랑을 주고 받도록 부부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가페는 주어보다 목적어(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가 중요하다. 나를 죽이고 배우자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가페는 에로스와는 반대로 아주 긴 시간을 지배한다. 감정이 아닌 관계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오래참고…”는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아가페는 용서를 주고받는 관계의 세계이다. 가정은 피차의 부족함을 서로 보듬어 안고, 함께 지어져가는(엡 2:2) 공동체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어져간다. 이 작은 공동체가 교회, 사회, 국가, 민족 등 세계 모든 공동체의 기초이다. 부부 문제가 심각한 가정도 아가페 사랑의 영을 받으면 달라진다. 관계의 기초를 든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의 영이 바로 성령이고,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가정의 어둠을 물리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해와 감사, 용서와 사랑의 영으로 지어져간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세상에 기쁨과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은 건강한 공동체이다. 완벽한 결혼은 없다. 건강한 결혼만 있다.
/ 최승구 목사(가정사역공동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며 ‘인자’가 과연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봐주십니까”(시 8:4)라는 말씀은 사람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사람’은 ‘에노쉬’ 즉, 연약한 인간, 죄짓기 쉬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배우자를 이 시각으로 보면 형편없다. 가정불화와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언급되는 ‘인자’는 ‘벤 아담’(아담의 자손, 사람의 아들)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타락 전의 인간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는 ‘생명을 주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된다. 연약하여 실수하는 인간은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회복된다. 그래서 모두가 연약하지만 가능성이 있다.
결혼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기쁨과 신선한 소망을 준다.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 이런 말이 있다. “아내가 없는 사람은 선함도, 도움도, 기쁨도, 축복도, 용서받음도, 웰빙도 없다.”
같이 살면 혼자 살 때보다 불편하다? 맞다. 그러나 그 불편을 상쇄하고도 넘칠만한 기쁨과 안정감, 평안과 소망, 위로가 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창세기에 남자 창조는 한 절이고, 여자 창조는 여섯 절이다. 여자는 돕는 배필이다. 도움이란 힘이 더 센 쪽에서 베푸는 것이다. 남자는 지어졌고(히브리어 -yatzsar, 영어-form), 여자는 만들어졌다(히브리어 -babag, 영어-build). 하나님은 결혼생활에서 다름을 경험하고 알아가며 새로운 세계를 살게 하셨다.
만남은 허물 많은 인간, 에노쉬들의 만남이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다른 점들을 이해하는 과정이 소중하다. 부부뿐 아니라 교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조화롭게 된다. 부부는 이해와 용납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감사를 경험하게 된다. 친밀감은 육체를 넘어서 영적인 관계까지 포함한다. 거기서 진정한 통합인 한 몸 됨이 이뤄진다.
결혼 전에 보이지 않았던 다른 점들이 결혼 후에 드러난다. 한때 둘이 나누었던 낭만과 에로스보다 바쁜 일과가 우선된다. 좋아했던 감정은 영원할 것 같지만 변한다. 이기심이 부딪힌다.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에로스’는 주어(내 기쁨, 내 만족)가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 사랑을 주고 받도록 부부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가페는 주어보다 목적어(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가 중요하다. 나를 죽이고 배우자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가페는 에로스와는 반대로 아주 긴 시간을 지배한다. 감정이 아닌 관계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오래참고…”는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아가페는 용서를 주고받는 관계의 세계이다. 가정은 피차의 부족함을 서로 보듬어 안고, 함께 지어져가는(엡 2:2) 공동체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어져간다. 이 작은 공동체가 교회, 사회, 국가, 민족 등 세계 모든 공동체의 기초이다. 부부 문제가 심각한 가정도 아가페 사랑의 영을 받으면 달라진다. 관계의 기초를 든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의 영이 바로 성령이고,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가정의 어둠을 물리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해와 감사, 용서와 사랑의 영으로 지어져간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세상에 기쁨과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은 건강한 공동체이다. 완벽한 결혼은 없다. 건강한 결혼만 있다.
/ 최승구 목사(가정사역공동체)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