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목사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책 읽어주는 목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김용규/ ivp/ 8,000원
며칠 전 서점에 가서 인문학이야기가 재미있을 것 같아 책을 집어 들었다. 일단 책이 얇아 마음에 들었고, 저자도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용규 작가라 갈등 없이 읽었는데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힘들게 읽었던 수많은 철학과 기독교 교리, 역사 등이 너무나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흐름을 기독교 사상의 관점에서 명쾌하게 뚫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과 역사를 정리한 것을 넘어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할 지 도전하기도 해서 내게 감동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인문학하면 신앙과 별 상관없는 세상 학문, 또는 취미생활이라 생각하지만 인문학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고, 세상의 흐름을 읽게 하는 학문이기에 이 세상에서 살고 있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과거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신학과 인문학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터뷸리안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현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지속적이고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누가 감히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현재 상황을 알려주는 인문학적 지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없다면 그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신학을 거부하며 신정통주의 신학을 시작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을 그리고 한 손에 신문을”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신앙을 흔드는 자유주의를 이겨내려면 세상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관심 없을 수 있다. 지식인들이라면 지금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바로 ‘호모데우스(신적 인간)시대’이다. 이 개념은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가 명명한 것인데 생명공학, 로보트공학,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과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취득한 극소수의 부자들이 그리스 신들처럼 불멸, 행복, 신성을 누리며 사는 시대를 말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70억 인구들은 초인간들을 먹여 살리고,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조종당하며,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계급, 곧 호모 유스리스(Homo useless)로 살게 된다. 이러한 조짐은 대자본과 결탁한 초대형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서 세계 각처에서 실현되고 있다. 각국은 빅데이터를 이용한 AI(인공지능)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신흥종교 ‘데이터교’가 발흥되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신도를 가진 데이터교는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AI를 신봉하는 종교이다. 우리도 스마트폰을 자기 전에 보고, 일어나자마자 보며 살고 있지 않는가? 모르면 “하나님께 기도해 봐!”가 아니라 “구글에게 물어 봐!”라고 쉽게 대답하지 않는가? 첨단기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데이터교의 신도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기술을 무작정 신봉하는 태도는 우리가 그들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세상은 시대적으로 급변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고 도전한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절하게 응전하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어왔다. 이번 변화와 도전의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과격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상은 기술문명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에 깊숙이 침투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고,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며, 허망한 것들에 집중하게 해서 인류를 파괴하고 멸망하게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취미생활을 넘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신학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인문학이 맹목적이 되지 않게 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인문학을 공부하고, 시대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이 얇은 책 한권이 더 많이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것이 참 신기하다.
/ 허원희 목사(남양주 온누리교회)
우리는 인문학하면 신앙과 별 상관없는 세상 학문, 또는 취미생활이라 생각하지만 인문학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고, 세상의 흐름을 읽게 하는 학문이기에 이 세상에서 살고 있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과거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신학과 인문학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터뷸리안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현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지속적이고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누가 감히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현재 상황을 알려주는 인문학적 지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없다면 그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신학을 거부하며 신정통주의 신학을 시작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을 그리고 한 손에 신문을”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신앙을 흔드는 자유주의를 이겨내려면 세상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관심 없을 수 있다. 지식인들이라면 지금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바로 ‘호모데우스(신적 인간)시대’이다. 이 개념은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가 명명한 것인데 생명공학, 로보트공학,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과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취득한 극소수의 부자들이 그리스 신들처럼 불멸, 행복, 신성을 누리며 사는 시대를 말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70억 인구들은 초인간들을 먹여 살리고,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조종당하며,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계급, 곧 호모 유스리스(Homo useless)로 살게 된다. 이러한 조짐은 대자본과 결탁한 초대형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서 세계 각처에서 실현되고 있다. 각국은 빅데이터를 이용한 AI(인공지능)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신흥종교 ‘데이터교’가 발흥되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신도를 가진 데이터교는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AI를 신봉하는 종교이다. 우리도 스마트폰을 자기 전에 보고, 일어나자마자 보며 살고 있지 않는가? 모르면 “하나님께 기도해 봐!”가 아니라 “구글에게 물어 봐!”라고 쉽게 대답하지 않는가? 첨단기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데이터교의 신도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기술을 무작정 신봉하는 태도는 우리가 그들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세상은 시대적으로 급변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고 도전한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절하게 응전하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어왔다. 이번 변화와 도전의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과격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상은 기술문명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에 깊숙이 침투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고,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며, 허망한 것들에 집중하게 해서 인류를 파괴하고 멸망하게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취미생활을 넘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신학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인문학이 맹목적이 되지 않게 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인문학을 공부하고, 시대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이 얇은 책 한권이 더 많이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것이 참 신기하다.
/ 허원희 목사(남양주 온누리교회)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