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기독문화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순교자들의 흔적 전북 고창 '덕암교회'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기독문화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순교자들의 흔적 전북 고창 ‘덕암교회’
순교자들의 흔적 전북 고창 ‘덕암교회’
전라북도 고창군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봄에는 화사한 꽃이 많아 화창(花敞), 여름에는 비가 많아서 우창(雨敞),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 고창(高敞), 겨울에는 눈이 많아서 설창(雪敞)이라 불린다. 볼거리도 많다.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읍성(邑城) 중에서도 원형이 잘 남아있는 모양성,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가 그곳에 있다.
비산비야(非山非野)로 펼쳐진 붉은 황토에서는 온갖 농산물이 풍요롭게 자라고, 선운산 깊은 골로 들어가면 사계절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다. 해안으로 나가면 드넓은 갯벌이 있어 백합조개와 바지락이 풍성하게 잡힌다. 바다와 닿은 인천강에서 잡힌 장어는 풍천장어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들녘에 엉켜있는 가시덤불은 달콤한 복분자를 내어준다.
어느 때부터인가 봄이 되면 고창 공음면으로 관광객이 몰려든다. 학원농장 청보리밭 때문이다. 클래식 선율처럼 높고 낮은 언덕을 따라 보리밭이 펼쳐져 있고, 보리밭 사이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청보리가 익을 때까지 한 달 이상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이 아름다운 농장에서 자동차 7분 거리에 순교자의 신앙과 뜨거운 눈물이 맺힌 ‘덕암교회’가 있다. 교회는 마을이 아닌 농경지를 바라보는 작은 언덕에 있다. 종을 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데 믿지 않는 이들도 고개를 돌려 교회를 쳐다보는 곳에 있다.
덕암교회는 전라도 일대를 담당하며 복음을 전하던 미국 남장로교선교회가 세웠다. 고창 덕암리 주변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처를 세웠는데 그 일을 계기로 교회가 태동했다. 그때가 1900년이었다. 고창군에 세워진 최초의 신앙공동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련을 신앙으로 견뎌낸 덕암교회는 1950년 공산당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만났다. 일제강점기에 단련된 믿음 때문일까? 공산군의 점령 아래에서도 덕암교회 성도들은 예배와 복음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광년 전도사가 덕암교회에 부임해서 사역하던 중에 전쟁을 만났다. 그는 주일과 수요일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날에는 주변 고을인 영광과 법성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적힌 깃발을 흔들며 다녔다. 1950년 9월 10일에도 늘 하던 대로 “예수 믿으세요. 믿고 천당 갑시다!”를 외치며 다녔다. 그가 전도하며 다니던 길 앞에 공산군이 나타났다. 공산군은 이광년 전도사를 법성포 대덕산 아래 해수 웅덩이로 끌고 가 무참히 살해하고 던져버렸다. 이광년 전도사는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저들을 용서해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스데반의 순교가 그곳에서도 있었다. 공산군은 이광년 전도사의 부인과 8살, 6살 된 두 아들도 이곳으로 끌고 와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영해 집사 가족은 일찍부터 예수를 믿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23일 공산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온 가족을 잡아들였다. “예수쟁이는 3대를 멸하고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믿던, 믿지 않던 온 가족을 덕암리 황산 아래로 끌고 가 죽였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정하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그때 죽임을 당한 가족이 16명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공산군이 패배를 거듭하자 그들은 더욱 악랄해졌다. 1950년 10월 19일 오계환 장로, 김순서 장로, 오병길 전도사, 오주환 집사가 몰래 예배를 드리다 발각되었다. 공산군은 가족까지 10명을 잡아들여 인민재판을 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오계환 장로의 아내 김금이 집사가 임신 중이었는데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간신히 탈출한 오계환 장로의 아들(당시 15살) 오균열이 훗날 목사가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개혁총회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순교자들의 믿음을 후세에 전했다.
덕암교회 마당에는 교회 종이 전시되어 있다. 1950년 10월 23일 공산군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 기물을 파괴하고 종을 떼어갔다. 박안희 성도는 종을 가져간 공산군 앞잡이를 찾아가 “종은 예배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니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유로 박안희 성도는 처형을 당했다. 종은 저수지에 던져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저수지 바닥에서 그 종을 찾았다. 그런데 종 옆에 있어야 할 바퀴가 없었다. 줄을 잡아당겨 종을 칠 때 바퀴가 있어야 소리가 난다. 하는 수 없이 새 바퀴를 제작해 걸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종을 ‘짝짝이 종’이라 불렀다. 이 종이 예배를 알릴 때면 마을 사람들은 순교자의 신앙을 떠올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교회 앞 기념비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문구가 크게 기록되었다. 기념비 앞에서 잠시 묵상에 잠겼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내 마음의 처소가 어디인가?’를 고민했다. 덕암교회 순교자들은 눈을 저 높은 곳에 두었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었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온누리교회, 문화해설사, <강화도(준엄한 배움의 길)> 저자)
비산비야(非山非野)로 펼쳐진 붉은 황토에서는 온갖 농산물이 풍요롭게 자라고, 선운산 깊은 골로 들어가면 사계절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다. 해안으로 나가면 드넓은 갯벌이 있어 백합조개와 바지락이 풍성하게 잡힌다. 바다와 닿은 인천강에서 잡힌 장어는 풍천장어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들녘에 엉켜있는 가시덤불은 달콤한 복분자를 내어준다.
어느 때부터인가 봄이 되면 고창 공음면으로 관광객이 몰려든다. 학원농장 청보리밭 때문이다. 클래식 선율처럼 높고 낮은 언덕을 따라 보리밭이 펼쳐져 있고, 보리밭 사이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청보리가 익을 때까지 한 달 이상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이 아름다운 농장에서 자동차 7분 거리에 순교자의 신앙과 뜨거운 눈물이 맺힌 ‘덕암교회’가 있다. 교회는 마을이 아닌 농경지를 바라보는 작은 언덕에 있다. 종을 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데 믿지 않는 이들도 고개를 돌려 교회를 쳐다보는 곳에 있다.
덕암교회는 전라도 일대를 담당하며 복음을 전하던 미국 남장로교선교회가 세웠다. 고창 덕암리 주변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처를 세웠는데 그 일을 계기로 교회가 태동했다. 그때가 1900년이었다. 고창군에 세워진 최초의 신앙공동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련을 신앙으로 견뎌낸 덕암교회는 1950년 공산당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만났다. 일제강점기에 단련된 믿음 때문일까? 공산군의 점령 아래에서도 덕암교회 성도들은 예배와 복음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광년 전도사가 덕암교회에 부임해서 사역하던 중에 전쟁을 만났다. 그는 주일과 수요일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날에는 주변 고을인 영광과 법성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적힌 깃발을 흔들며 다녔다. 1950년 9월 10일에도 늘 하던 대로 “예수 믿으세요. 믿고 천당 갑시다!”를 외치며 다녔다. 그가 전도하며 다니던 길 앞에 공산군이 나타났다. 공산군은 이광년 전도사를 법성포 대덕산 아래 해수 웅덩이로 끌고 가 무참히 살해하고 던져버렸다. 이광년 전도사는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저들을 용서해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스데반의 순교가 그곳에서도 있었다. 공산군은 이광년 전도사의 부인과 8살, 6살 된 두 아들도 이곳으로 끌고 와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영해 집사 가족은 일찍부터 예수를 믿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23일 공산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온 가족을 잡아들였다. “예수쟁이는 3대를 멸하고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믿던, 믿지 않던 온 가족을 덕암리 황산 아래로 끌고 가 죽였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정하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그때 죽임을 당한 가족이 16명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공산군이 패배를 거듭하자 그들은 더욱 악랄해졌다. 1950년 10월 19일 오계환 장로, 김순서 장로, 오병길 전도사, 오주환 집사가 몰래 예배를 드리다 발각되었다. 공산군은 가족까지 10명을 잡아들여 인민재판을 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오계환 장로의 아내 김금이 집사가 임신 중이었는데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간신히 탈출한 오계환 장로의 아들(당시 15살) 오균열이 훗날 목사가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개혁총회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순교자들의 믿음을 후세에 전했다.
덕암교회 마당에는 교회 종이 전시되어 있다. 1950년 10월 23일 공산군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 기물을 파괴하고 종을 떼어갔다. 박안희 성도는 종을 가져간 공산군 앞잡이를 찾아가 “종은 예배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니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유로 박안희 성도는 처형을 당했다. 종은 저수지에 던져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저수지 바닥에서 그 종을 찾았다. 그런데 종 옆에 있어야 할 바퀴가 없었다. 줄을 잡아당겨 종을 칠 때 바퀴가 있어야 소리가 난다. 하는 수 없이 새 바퀴를 제작해 걸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종을 ‘짝짝이 종’이라 불렀다. 이 종이 예배를 알릴 때면 마을 사람들은 순교자의 신앙을 떠올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교회 앞 기념비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문구가 크게 기록되었다. 기념비 앞에서 잠시 묵상에 잠겼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내 마음의 처소가 어디인가?’를 고민했다. 덕암교회 순교자들은 눈을 저 높은 곳에 두었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었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온누리교회, 문화해설사, <강화도(준엄한 배움의 길)> 저자)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