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크리스천의 정신건강_영적 탈진] 공감(共感)이 정답이다!

크리스천의 정신건강
영적 탈진
 
공감(共感)이 정답이다!
영적 탈진에서 벗어나는 방법
 
지난주(11월 26일) 토요일 임직예배에서 522명의 새로운 청지기들이 세워졌다. 이들은 맡은 직분과 사명에 따라 교회 안팎에서 청지기로서 사역을 감당할 귀한 일꾼들이다. 교회 사역은 교회에서 하는 일을 뜻한다. 찬양 가사를 띄우는 일, 예배 실황을 녹화하는 일, 새로 온 성도들을 맞이하는 일, 주보 및 유인물을 나눠주는 일, 성경공부 및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는 일 등이 전부 교회 사역이다. 직분자뿐만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교회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사역하는 사람들은 사역을 개인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 여긴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사역의 목적은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혼을 살리는 데 있다. 그런 일에 꼼수를 부릴 수 없다. 사회에서 하는 일은 적당히 눈치껏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고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쉽게 지친다.
‘탈진’이 힘이 다 빠져 기운이 없는 상태라면, ‘영적 탈진’은 사역하다가 영적으로 힘이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영적 탈진의 주된 원인은 받은 은혜보다 사역에 더 큰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역에 쏟은 에너지를 능가하는 은혜를 받는 사람은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없다.
 
엘리야의 영적 탈진
board image<디리크 보우츠가 그린 '광야의 예언자 엘리야'>


 성경에서 대표적인 영적 탈진 사례를 들라면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일 것이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2~4).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겼다. 큰 승리를 거둔 이후 긴장이 풀린 엘리야에게 사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찾아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 늘 하나님만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세벨이라는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엘리야는 혼자 남겨진 외로운 선지자였고, 이세벨은 역사상 가장 악독한 왕비였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보면 무조건 엘리야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엘리야는 불리한 현실에 눌려 그만 영적 탈진에 빠지고 만다. 
영적 탈진을 경험한 엘리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90마일(144km)이나 떨어진 브엘세바(가나안 최남단)로 도망쳤다. 그러고도 이세벨이 찾아낼까 불안해 하루 정도 거리의 광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숨어서도 불안이 지속되자 엘리야는 급기야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자청했다. 영적 탈진이 불안으로, 불안이 도피로, 도피가 절망으로, 절망이 포기로 이어진 것이다.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이 종종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거나, 놀라운 업적을 이룬 사람이 돌연 자살하기도 한다.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더는 이루고 싶은 게 없어서 탈진을 실감하게 된다.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역을 통해 큰 부흥을 경험하고 나면 공허함에 사로잡혀 금방 무너진다. 사탄의 말에 귀가 팔랑대고 정작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이때를 놓칠 사탄이 아니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해봤자 누가 알아주지도 않아. 네 주제에 무슨 순장이야.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며 끝도 없이 속삭인다. 
어쩌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이다. 그러니 사역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수밖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대하는 만큼의 열매가 열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사역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실망한다. 노력의 크기와 실망의 크기는 비례한다. 열정적인 사람일수록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영적 탈진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사역에서 오는 실망은 욕심일 뿐이다. 사역의 목적은 부흥이 아니다.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했다면, 단 한 명이라도 변화했다면 실패라고 할 수 없다. ‘왜 남들은 나처럼 하지 않지?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만 일을 하네’라며 본인이 모든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욕심이다. 분명 사역은 하나님의 일인데 내가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 의가 드러나게 되고,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사역 곧,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사역해야 하는데,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당연히 벅찰 수밖에 없다. 탈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엘리야처럼 영적으로 탈진한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어한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지금까지 나는 뭘 한 거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괜한 짓 하는 거 아닌가?’ 오만가지 생각을 혼자 하다가 갑자기 동굴로 들어간다. 주변 사람이 걱정할 정도로 열심을 다하던 사역을 단번에 놔버린다.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 교회를 떠나 세상 속으로 깊이 숨어버린다. 영적 탈진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단순히 사역할 기운을 잃는 게 아니라 무력감에 스스로 도피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초심을 잃지 말고,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래야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성공이 없어도 영적으로 탈진하지 않는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사님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은 젊어서부터 시골 목회를 하고 싶었다. 도시에 있는 중형 교회 부목사 청빙도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시골로 내려왔다. 시골의 한 교회에서 시작된 농촌사역은 무려 20년 동안 계속됐다. 부부는 헌신적이었다. 하루는 어느 성도에게 아프다고 전화가 왔다. 목사님은 출산 직전의 아내를 뒤로 하고 아픈 성도와 함께 병원에 갔다. 농촌교회의 열악한 현실 때문에 자녀도 한 명만 낳았다. 하지만 교회는 부흥하지 않았다. 가정살림은 자녀 공부도 시키지 못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일주일에 세 번씩 성도들 몰래 읍내에서 청소 일을 했다. 성도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멀리서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래도 사모님은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한 마디씩 했다.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못해.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심지어는 하나뿐인 아들도 부부를 원망했다. 
“하나님을 왜 그렇게 요란하게 믿어요? 여유 있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죽을 힘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건 원망과 비난뿐이었다. 사모님은 우울증에 걸렸고, 목사님은 마음고생으로 안면마비까지 왔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부부는 지쳤고, 외로움을 호소했다. ‘하나님은 분명 이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부르실 텐데…’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상담실에서 그 목사님 부부와 함께 한참을 울었다. 
엘리야가 탈진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혼내지 않으셨다. 대신 천사를 보내 엘리야의 상한 마음을 달래주셨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왕상 19:5~7). 
이 목회자 부부처럼 사역을 감당하다가 영적으로 탈진할 수 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상실의 깊이도 더 깊다. 영적 탈진에 빠졌다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것도, 사탄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지친 것뿐이다. 
그들에게는 말보다 사랑과 공감이 필요하다. 주저앉은 동역자를 본다면 다독여주기를 바란다. 다그치지 말고, 정죄하지도 말고, 왜 이렇게 지칠 수밖에 없었는지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한다. 정답은 공감이다.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
/ 이정환 목사(도곡공동체, 책 <내 마음이 아픕니다>, <신앙의 사계절> 저자) 

<발문>
영적 탈진한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공감이 필요하다 
다그치지 말고, 정죄하지도 말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자 
공감이 정답이다.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