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거짓말에 따라 살지 말라!
“거짓말에 따라 살지 말라!”
크리스천들이 말(言)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
크리스천들이 말(言)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
1974년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조국인 구소련에서 강제 추방되기 하루 전 동포들에게 “거짓말에 따라 살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솔제니친은 그를 추방하는 조국을 인간의 본성과 사회가 이미 결정된 사양으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는 환상인 이데올로기로 운영되는 체제로 보았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거짓말’로 지칭했다. 조지 오웰도 소설 <1984>에서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국력’이라는 거짓 슬로건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도록 강제하며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빅 브라더’ 사회를 비판했다.
말(言)을 잘못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
솔제니친이 동포들에게 정권을 유지시키는 거짓말에 협조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촉구한 이유는 가장 소심한 사람이라도 거짓말에 협조하지 않는 게 정신적 독립을 향한 가장 덜 힘든 첫걸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거짓말에 따라 살지 않고, 수동적이나마 저항의 길로 함께 행진한다면 비인간적인 체제 전체가 비틀거리고 무너질 것이라 예견했다.
전체주의 사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존귀한 가치를 갖는다는 진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우연의 산물인 분자의 집합에 불과한 개인은 체제 유지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반한다. 이 세계관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다.
말(言)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한다.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은 정확하게 말하는 능력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거짓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체주의 사회가 고집스럽게 거짓말을 강요하고, 거짓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세뇌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솔제니친이나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종류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현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언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어가 더는 현실을 드러내지 않으며, 현실을 알 수 있는 안정적인 방법도 아니라고 한다. 진리는 알 수 없고, 언어는 주어진 게 아니며, 오직 스스로 현실과 단어를 정의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정체성조차 스스로 정의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언어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의미를 임의적으로 반영하는 단순한 파워게임이다. 언어에는 ‘규칙’이 없고, 많은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게 곧 그 단어의 정의다.
1871년 발표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편인 루이스 캐롤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험티는 앨리스에게 단어는 “내가 의미하는 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당대 사람들은 험티의 말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니체가 나타나 험티의 말이 옳았고, 언어는 가변적이라고 제안한 이래, 자크 데리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해체주의 창시)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언어철학자) 같은 사람들은 언어뿐 아니라 현실도 가변적이라 제안했다. 데리다는 모든 것이 텍스트라면 해석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진리의 존재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관에서 언어, 예술, 현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객관적 의미가 없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정체성도 스스로 구성하는 거라고 주장하는 세계관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된 존재로서의 인간도 부인한다.
실제 지난 3월 우리나라 법원도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는 남성의 성별 정정 신청을 인정해 줌으로써 남성과 여성은 변하지 않는 현실이 아니라 당사자의 의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남성 대명사(he, his, him)나 여성 대명사(she, her)도 그 사람의 생물학적 현실과 무관하게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현실도 의미도 없는 세상에서 언어는 그저 다른 단어들만을 지칭하는 거라고 가정하는 상황에서 대명사를 어떻게 쓰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래서 차별적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 대신 새로운 성중립 대명사를 만들고, 초등학교 1학년 학생조차 자신을 표현할 대명사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10대들에게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라는 말 대신 파트너(동반자)라는 말을 쓰라고 하고, 어머니나 임산부라는 용어 대신 ‘출산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권고한다. 우리나라도 성별 정정뿐만 아니라 생활동반자법안을 발의해 동거와 결혼을 유사하게 취급하며 결혼과 가족의 의미를 바꾸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전체주의 사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존귀한 가치를 갖는다는 진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우연의 산물인 분자의 집합에 불과한 개인은 체제 유지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반한다. 이 세계관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다.
말(言)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한다.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은 정확하게 말하는 능력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거짓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체주의 사회가 고집스럽게 거짓말을 강요하고, 거짓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세뇌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솔제니친이나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종류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현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언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어가 더는 현실을 드러내지 않으며, 현실을 알 수 있는 안정적인 방법도 아니라고 한다. 진리는 알 수 없고, 언어는 주어진 게 아니며, 오직 스스로 현실과 단어를 정의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정체성조차 스스로 정의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언어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의미를 임의적으로 반영하는 단순한 파워게임이다. 언어에는 ‘규칙’이 없고, 많은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게 곧 그 단어의 정의다.
1871년 발표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편인 루이스 캐롤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험티는 앨리스에게 단어는 “내가 의미하는 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당대 사람들은 험티의 말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니체가 나타나 험티의 말이 옳았고, 언어는 가변적이라고 제안한 이래, 자크 데리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해체주의 창시)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언어철학자) 같은 사람들은 언어뿐 아니라 현실도 가변적이라 제안했다. 데리다는 모든 것이 텍스트라면 해석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진리의 존재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관에서 언어, 예술, 현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객관적 의미가 없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정체성도 스스로 구성하는 거라고 주장하는 세계관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된 존재로서의 인간도 부인한다.
실제 지난 3월 우리나라 법원도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는 남성의 성별 정정 신청을 인정해 줌으로써 남성과 여성은 변하지 않는 현실이 아니라 당사자의 의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남성 대명사(he, his, him)나 여성 대명사(she, her)도 그 사람의 생물학적 현실과 무관하게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현실도 의미도 없는 세상에서 언어는 그저 다른 단어들만을 지칭하는 거라고 가정하는 상황에서 대명사를 어떻게 쓰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래서 차별적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 대신 새로운 성중립 대명사를 만들고, 초등학교 1학년 학생조차 자신을 표현할 대명사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10대들에게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라는 말 대신 파트너(동반자)라는 말을 쓰라고 하고, 어머니나 임산부라는 용어 대신 ‘출산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권고한다. 우리나라도 성별 정정뿐만 아니라 생활동반자법안을 발의해 동거와 결혼을 유사하게 취급하며 결혼과 가족의 의미를 바꾸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말(言)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강요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의 예시인가? 그 해답은 “단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말은 실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현실이 실현되게 하셨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신 세상 그 자체인 현실 세계에서 사물의 이름을 짓고, 구별하며, 객관적인 현실과 일치한다. 실제 세상이 존재하고 성별이 구분되는 것은 현실 세계의 일부이다.
단어는 무작위적인 해석 그 이상의 진정한 현실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세상의 기본은 육신이 되어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임을 알려준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 말씀하셨던 기록된 말씀까지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말은 실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현실이 실현되게 하셨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신 세상 그 자체인 현실 세계에서 사물의 이름을 짓고, 구별하며, 객관적인 현실과 일치한다. 실제 세상이 존재하고 성별이 구분되는 것은 현실 세계의 일부이다.
단어는 무작위적인 해석 그 이상의 진정한 현실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세상의 기본은 육신이 되어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임을 알려준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 말씀하셨던 기록된 말씀까지 우리에게 주셨다.
말씀은 바뀔 수 없고, 놀라운 힘이 있다!
말씀은 바뀔 수 없다. 문화적 변덕에 말과 그 의미를 굴복시키는 것은 우리를 헛된 바벨탑으로 이끌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이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말도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말은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거나 왜곡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말은 인상, 믿음, 심지어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실제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폭력은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르완다 후투족 지도자들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나치는 유대인을 ‘기생충’이라 부르며 인종 학살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낙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태아는 ‘수정의 산물’, 낙태는 ‘의료 서비스’로 지칭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로서의 태아의 고유한 가치를 축소시킨다.
단어가 그 고유한 의미를 잃게 되면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故 마이클 보먼 신학 교수).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우리의 말은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간 능력의 필수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거짓된 언어를 사용하고, 이를 장려하는 것은 창조에 반하는 언어 행위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의 실체와 존엄성, 가치에 대한 공격이다. 여성, 남성 대명사를 마음대로 바꿔서 사용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단어와 생물학적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그 현실을 부정하며, 실제 진리로부터 사람들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캘빈 로빈스 목사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지칭할 때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보다 덜 아신다”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라이 라버티(신학저널 <애드폰테스> 편집장)는 이를 “하나님이 우리의 언어를 만드신 목적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분명히 구별할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구별해서 만드신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별하는 그대로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거짓에 따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짓된 혀(잠 6:17)를 미워하시는 이유이다.
기독교인들은 말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와 이단들은 항상 단어에 대해 싸우곤 했다. 단어가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던 G.K. 체스터턴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하선희 집사(강남E공동체, 콜슨 펠로우즈 한국 지부 대표)
실제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폭력은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르완다 후투족 지도자들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나치는 유대인을 ‘기생충’이라 부르며 인종 학살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낙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태아는 ‘수정의 산물’, 낙태는 ‘의료 서비스’로 지칭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로서의 태아의 고유한 가치를 축소시킨다.
단어가 그 고유한 의미를 잃게 되면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故 마이클 보먼 신학 교수).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우리의 말은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간 능력의 필수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거짓된 언어를 사용하고, 이를 장려하는 것은 창조에 반하는 언어 행위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의 실체와 존엄성, 가치에 대한 공격이다. 여성, 남성 대명사를 마음대로 바꿔서 사용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단어와 생물학적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그 현실을 부정하며, 실제 진리로부터 사람들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캘빈 로빈스 목사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지칭할 때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보다 덜 아신다”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라이 라버티(신학저널 <애드폰테스> 편집장)는 이를 “하나님이 우리의 언어를 만드신 목적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분명히 구별할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구별해서 만드신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별하는 그대로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거짓에 따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짓된 혀(잠 6:17)를 미워하시는 이유이다.
기독교인들은 말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와 이단들은 항상 단어에 대해 싸우곤 했다. 단어가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던 G.K. 체스터턴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하선희 집사(강남E공동체, 콜슨 펠로우즈 한국 지부 대표)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