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전쟁과 평화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전쟁과 평화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는 이 유명한 찬양 구절은 윌 듀런트의 말 “3421년의 인류 역사 중 전쟁을 겪지 않은 해가 고작 258년도 안 된다”는 인류의 현실을 반영한다. 매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 소식을 접하거나 휴전국에서 살아가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섬기라”(롬 12:17~21)는 말씀과 “악행하는 자들을 벌하라”(롬 13:1~7)는 말씀이 일견 상충되어 보인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하는 어떤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생명이 반드시 희생된다는 현실 때문에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로마서> 12장은 개인이 사적 보복을 하지 말고 분노와 원수 갚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맡기라는 의미이며, 13장은 국가나 공적 권위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악행하는 자들을 벌하는 역할이다.”
오늘날 악인에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법 하나가 국가를 통한 것이다. 철학자 아서 홈즈도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마 5:39)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맥락이지 정의의 추구는 사적 보복이 아니고, 전쟁 등을 통해 국가를 방어하고 법의 집행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은 이처럼 악이 횡행하는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필요악이다. 관건은 전쟁이 악한가가 아니라 전쟁이 불가피할 때 그 악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구약의 ‘거룩한 전쟁’의 개념을 체계화해서 ‘의로운 전쟁’이라는 전통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정당한 근거(방어), 올바른 의도(정의로운 평화의 확보), 최후의 수단, 공식적 선포(합법적 권위에 의한 최후통첩에 따른 개시), 수단의 통제(전쟁이 가하는 폭력은 전쟁이 바로잡고자 하는 폭력보다 적을 것), 비전투원 배제(민간인 보호), (승전에 대한) 합리적인 기대라는 일곱 가지 판단 기준이 포함된다.
모든 나라가 이 전통에 따른다면 전쟁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핵·생화학 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국가 간 전쟁뿐 아니라 테러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의로운 전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인, 어린이 같은 비전투원을 확실히 구별하고, 핵무기 같은 무차별적 무기는 극도로 긴급하고 더 심한 악을 초래할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며, 핵 보유는 그 목적이 사용이 아니라 평화의 유지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서는 더 큰 악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양심의 자유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할 것도 강조한다. 이 무거운 주제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을 일깨워 준다.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테러 집단에게도 평화의 좋은 소식을 알리고, 핵 문제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평화의 공동체로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면서 신뢰를 구축하고 목소리를 내고, 공적 토론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톨킨의 <두 개의 탑>에서 그만 싸움을 포기하자는 말에 메리는 “숲이 불타면 이 세상에서 한때 위대하고 좋았던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라며 반박한다. 우리가 자유와 정의를 통해 진리를 전파하지 못하면 더는 정의롭게 행동할 자유와 평화가 없는 날이 올 것이다. C.S.루이스는 “‘전쟁은 언제나 더 큰 악’이라는 신조는 죽음과 고통이 가장 큰 악이라는 유물론적 윤리를 함축한 것이며… 인간이 하는 일이 고통을 뿌리 뽑을 수는 없지만… 최선의 결과를 이뤄내는 사람들은 제한된 목표를 위해 조용히 힘쓴 사람들”이라고 했다. 비록 세상에는 환난과 전쟁이 있으나 세상을 이기셨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임무를 다하며(딤후 4:5), 지금 이곳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라고 부르신 소명에 충성하며 담대히 살아갈 소망이 있다.
/ 하선희 집사(강남E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로마서> 12장은 개인이 사적 보복을 하지 말고 분노와 원수 갚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맡기라는 의미이며, 13장은 국가나 공적 권위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악행하는 자들을 벌하는 역할이다.”
오늘날 악인에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법 하나가 국가를 통한 것이다. 철학자 아서 홈즈도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마 5:39)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맥락이지 정의의 추구는 사적 보복이 아니고, 전쟁 등을 통해 국가를 방어하고 법의 집행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은 이처럼 악이 횡행하는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필요악이다. 관건은 전쟁이 악한가가 아니라 전쟁이 불가피할 때 그 악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구약의 ‘거룩한 전쟁’의 개념을 체계화해서 ‘의로운 전쟁’이라는 전통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정당한 근거(방어), 올바른 의도(정의로운 평화의 확보), 최후의 수단, 공식적 선포(합법적 권위에 의한 최후통첩에 따른 개시), 수단의 통제(전쟁이 가하는 폭력은 전쟁이 바로잡고자 하는 폭력보다 적을 것), 비전투원 배제(민간인 보호), (승전에 대한) 합리적인 기대라는 일곱 가지 판단 기준이 포함된다.
모든 나라가 이 전통에 따른다면 전쟁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핵·생화학 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국가 간 전쟁뿐 아니라 테러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의로운 전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인, 어린이 같은 비전투원을 확실히 구별하고, 핵무기 같은 무차별적 무기는 극도로 긴급하고 더 심한 악을 초래할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며, 핵 보유는 그 목적이 사용이 아니라 평화의 유지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상황에서는 더 큰 악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양심의 자유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할 것도 강조한다. 이 무거운 주제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을 일깨워 준다.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테러 집단에게도 평화의 좋은 소식을 알리고, 핵 문제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평화의 공동체로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면서 신뢰를 구축하고 목소리를 내고, 공적 토론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톨킨의 <두 개의 탑>에서 그만 싸움을 포기하자는 말에 메리는 “숲이 불타면 이 세상에서 한때 위대하고 좋았던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라며 반박한다. 우리가 자유와 정의를 통해 진리를 전파하지 못하면 더는 정의롭게 행동할 자유와 평화가 없는 날이 올 것이다. C.S.루이스는 “‘전쟁은 언제나 더 큰 악’이라는 신조는 죽음과 고통이 가장 큰 악이라는 유물론적 윤리를 함축한 것이며… 인간이 하는 일이 고통을 뿌리 뽑을 수는 없지만… 최선의 결과를 이뤄내는 사람들은 제한된 목표를 위해 조용히 힘쓴 사람들”이라고 했다. 비록 세상에는 환난과 전쟁이 있으나 세상을 이기셨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임무를 다하며(딤후 4:5), 지금 이곳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라고 부르신 소명에 충성하며 담대히 살아갈 소망이 있다.
/ 하선희 집사(강남E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비록 세상에는 환난과 전쟁이 있으나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일에 정신 차리고
지금 이곳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라고 부르신 소명에
충성하며 담대히 살아갈 소망이 있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일에 정신 차리고
지금 이곳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라고 부르신 소명에
충성하며 담대히 살아갈 소망이 있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