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을 위한 부부상담] 무조건적 용납과 사랑
크리스천을 위한 부부상담
무조건적 용납과 사랑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렇다. 아이가 유독 활동량이 많아지는 나이에는 부모의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가족이 함께 외식하러 갔을 때, 또는 공공장소에 외출 갔을 때에 부모는 더 집중해서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다. 방심하는 순간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아이가 활동량이 많아지는 시기가 되면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안 돼”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 행동을 하게 되면 아이가 불편해질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는 그런 지적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할 때, 아이들은 “싫어”라고 반응하곤 한다. ‘안 돼’와 ‘싫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긴장감을 가중시킨다.
자기주장이 강해지기 시작하는 아이가 사회적 행동을 할 때 실수하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늘 얌전히 있거나 너무 이른 나이에 사회적 행동 규범의 틀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건강한 모습이 아니다. ‘안 돼’나 ‘싫어’라는 통제와 주장이 불꽃을 튀기는 시기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시기에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 용납과 사랑을 경험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지만, 정작 사과하는 사람은 부모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그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의 잘못을 부모의 잘못으로 여기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아이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정중하게 부탁한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하는 특별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온 세대가 함께 찬양하고, 은혜롭게 예배가 진행됐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이 되었다. 어른들은 집중해서 설교를 듣는데, 아이들은 집중하지 못하고 앞뒤로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부모가 준비한 간식을 먹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음료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앉아있던 성도들에게 튀어서 얼굴과 옷에 묻게 됐다. 예배 중에 발생한 몹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평온한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그 아이뿐이었다. 실수하고, 많은 분에게 피해를 미쳤지만, 정작 그 아이는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안절부절못한 사람은 그 아이 엄마였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 대신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휴지를 건네면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아이 대신 용서를 구했다. 사고를 쳤지만 표정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아이의 모습과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미안함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우리도 아이처럼 실수할 수 있다. 인간은 완벽하게 살 수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는 살면서 실수한다. 주변 사람에게 의도하지 않게 음료를 뿌렸던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의 부모가 그 실수 이후 더욱 강박적으로 교육한다면 아이는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크고 작은 실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연하게 대해주는 게 필요하다.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곳이 가정이다.
둘째, 우리의 행동이 가족구성원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실수를 저지른 아이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고,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미쳤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오직 아이만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때론 아이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이 한 행동이 가족구성원에게 어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녀에게 거친 언어를 친근감으로 표현하는 부모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친구 관계는 비속어를 많이 할수록 더 친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가족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하대하는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다. “아니 왜 자식에게 이런 말도 하지 못하냐?”라고 한다면 실수를 저지르고도 전혀 미안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은 나의 행동과 언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될지를 느껴볼 경험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상대방, 그리고 상황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셋째,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와 사랑이 필요하다. 무조건적 용납을 경험해야 한다. 위에 소개됐던 아이는 그 상황에서 직접적인 책망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가 주변 사람들에게 대신 용서를 구해주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후회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경험 가운데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을 향한 책망과 질책, 죄책감이 지속적으로 뿌리내리고 자라날 수 있다. 자기를 수용하기보다 계속 질책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후회가 남는 일을 했을지라도 부모가 대신 용서를 구해주면서 아이를 다시 안아주는 것처럼, 자신이 용납되는 경험을 하는 곳이 가정이고, 가족관계가 되어야 한다.
넷째, 가족구성원을 이익이나 손실을 떠나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은 살면서 많은 실수와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 가까운 관계에서 쌓이는 불편한 경험일 수 있다. 항상 세면과 양치를 자기 직전에 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날도 늦은 밤이 되도록 세면과 양치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빠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는 빨리빨리 씻고 잘 준비하지 왜 그렇게 늦게 씻니?”라고 혼을 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이는 이른 저녁에 이미 세면과 양치를 했고, 자기 전에 밀린 과제를 하고 있었다. 혼이 난 아이는 몹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다 했는데 왜 혼내세요?” 정말 불편하고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시간이 됐다. 멋쩍었던 아빠는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서로 오해하고, 서로를 불편하게 했을지라도 다시 포용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이가 가족관계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미안하구나!”, ”사랑한다!”라는 진심 어린 말이면 충분히 사람은 용납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황규복 박사, 김숙경 소장 부부 (두란노 결혼예비학교 부부 강사, <그런 당신이 좋다> 저자)
자기주장이 강해지기 시작하는 아이가 사회적 행동을 할 때 실수하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늘 얌전히 있거나 너무 이른 나이에 사회적 행동 규범의 틀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건강한 모습이 아니다. ‘안 돼’나 ‘싫어’라는 통제와 주장이 불꽃을 튀기는 시기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시기에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 용납과 사랑을 경험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지만, 정작 사과하는 사람은 부모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그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의 잘못을 부모의 잘못으로 여기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아이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정중하게 부탁한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하는 특별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온 세대가 함께 찬양하고, 은혜롭게 예배가 진행됐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이 되었다. 어른들은 집중해서 설교를 듣는데, 아이들은 집중하지 못하고 앞뒤로 몸을 움직이기도 하고, 부모가 준비한 간식을 먹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음료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앉아있던 성도들에게 튀어서 얼굴과 옷에 묻게 됐다. 예배 중에 발생한 몹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평온한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그 아이뿐이었다. 실수하고, 많은 분에게 피해를 미쳤지만, 정작 그 아이는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안절부절못한 사람은 그 아이 엄마였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 대신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휴지를 건네면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아이 대신 용서를 구했다. 사고를 쳤지만 표정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아이의 모습과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미안함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우리도 아이처럼 실수할 수 있다. 인간은 완벽하게 살 수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는 살면서 실수한다. 주변 사람에게 의도하지 않게 음료를 뿌렸던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의 부모가 그 실수 이후 더욱 강박적으로 교육한다면 아이는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크고 작은 실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연하게 대해주는 게 필요하다.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곳이 가정이다.
둘째, 우리의 행동이 가족구성원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실수를 저지른 아이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고,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미쳤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오직 아이만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때론 아이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이 한 행동이 가족구성원에게 어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녀에게 거친 언어를 친근감으로 표현하는 부모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친구 관계는 비속어를 많이 할수록 더 친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가족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하대하는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다. “아니 왜 자식에게 이런 말도 하지 못하냐?”라고 한다면 실수를 저지르고도 전혀 미안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은 나의 행동과 언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될지를 느껴볼 경험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상대방, 그리고 상황을 볼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셋째,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와 사랑이 필요하다. 무조건적 용납을 경험해야 한다. 위에 소개됐던 아이는 그 상황에서 직접적인 책망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가 주변 사람들에게 대신 용서를 구해주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후회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경험 가운데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을 향한 책망과 질책, 죄책감이 지속적으로 뿌리내리고 자라날 수 있다. 자기를 수용하기보다 계속 질책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후회가 남는 일을 했을지라도 부모가 대신 용서를 구해주면서 아이를 다시 안아주는 것처럼, 자신이 용납되는 경험을 하는 곳이 가정이고, 가족관계가 되어야 한다.
넷째, 가족구성원을 이익이나 손실을 떠나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은 살면서 많은 실수와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 가까운 관계에서 쌓이는 불편한 경험일 수 있다. 항상 세면과 양치를 자기 직전에 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날도 늦은 밤이 되도록 세면과 양치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빠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는 빨리빨리 씻고 잘 준비하지 왜 그렇게 늦게 씻니?”라고 혼을 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이는 이른 저녁에 이미 세면과 양치를 했고, 자기 전에 밀린 과제를 하고 있었다. 혼이 난 아이는 몹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다 했는데 왜 혼내세요?” 정말 불편하고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시간이 됐다. 멋쩍었던 아빠는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서로 오해하고, 서로를 불편하게 했을지라도 다시 포용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이가 가족관계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미안하구나!”, ”사랑한다!”라는 진심 어린 말이면 충분히 사람은 용납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황규복 박사, 김숙경 소장 부부 (두란노 결혼예비학교 부부 강사, <그런 당신이 좋다> 저자)
작성자 김다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