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소나타 시가 한일 리더십 포럼 윤형주 장로 간증]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러브소나타 시가 한일 리더십 포럼
윤형주 장로 간증
윤형주 장로 간증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된 용정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 27년 2개월의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과 나는 육촌 관계이다. 우리 집안은 1890년대 말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조선 땅 북방의 북간도에 들어올 당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 영향으로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알았고, 주일학교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성경 말씀에 따라 살고자 몸부림쳤던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앞서가는 교육의 나라였던 일본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었다. 나의 부친은 명치(메이지, 明治)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와세다대학에서 강의한 윤영춘 박사로, 조카 윤동주의 일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부친은 일본의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동경의 릿쿄대학에 조카 윤동주를 입학시키고, 이후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시키셨다. 부친은 그의 하숙방까지 구해 주고 나서야 동경으로 가셨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다. 가계로는 당숙과 조카 사이면서 어린 시절에는 주일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다. 또 용정중학교에서는 교사와 제자였으며, 문학적으로는 모두 시인이자 선배와 후배, 서로를 존경하는 문학지기였다. 두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뜻을 품은 동지이기도 했다.
윤동주는 앞서가는 교육의 나라였던 일본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었다. 나의 부친은 명치(메이지, 明治)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와세다대학에서 강의한 윤영춘 박사로, 조카 윤동주의 일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부친은 일본의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동경의 릿쿄대학에 조카 윤동주를 입학시키고, 이후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시키셨다. 부친은 그의 하숙방까지 구해 주고 나서야 동경으로 가셨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다. 가계로는 당숙과 조카 사이면서 어린 시절에는 주일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다. 또 용정중학교에서는 교사와 제자였으며, 문학적으로는 모두 시인이자 선배와 후배, 서로를 존경하는 문학지기였다. 두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뜻을 품은 동지이기도 했다.
유산처럼 물려주신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미움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미움
도시샤대학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1943년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아버지는 동경에서 매주 후쿠오카 형무소로 조카 윤동주를 면회하러 가셨다. 나날이 수척해지는 그의 모습에 아버지는 “왜 이렇게 몸이 말라 가느냐?”고 물으셨고, 윤동주는 “간수들이 영양제라고 하면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놔주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전보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윤동주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가져가시오. 만약 시신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이 시신을 규슈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해부용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후쿠오카 형무소로 달려간 아버지 앞에는 차디찬 주검이 된 조카 윤동주가 누워 있었다.
일본의 명문대를 나오셨던 아버지는 조카의 죽음 이후 절대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1978년 별세하신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일본에 대한 미움과 분노, 원망과 증오였다.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가수가 된 나는 이후 일본의 유명한 가수들과 친구가 되어 가깝게 지내면서 양국을 오가며 함께 공연했다. 그러나 후쿠오카 지역만큼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곳은 형님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곳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슬픔과 원망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후쿠오카를 생각하면 조카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고, 우리에게 유산처럼 물려주신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미움이 되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전보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윤동주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가져가시오. 만약 시신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이 시신을 규슈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해부용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고 부랴부랴 후쿠오카 형무소로 달려간 아버지 앞에는 차디찬 주검이 된 조카 윤동주가 누워 있었다.
일본의 명문대를 나오셨던 아버지는 조카의 죽음 이후 절대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1978년 별세하신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일본에 대한 미움과 분노, 원망과 증오였다.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가수가 된 나는 이후 일본의 유명한 가수들과 친구가 되어 가깝게 지내면서 양국을 오가며 함께 공연했다. 그러나 후쿠오카 지역만큼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곳은 형님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곳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슬픔과 원망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후쿠오카를 생각하면 조카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고, 우리에게 유산처럼 물려주신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미움이 되살아났다.
“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일본을 용서했겠니? 용서하지 않았겠니?”
일본을 용서했겠니? 용서하지 않았겠니?”
시간이 흐르고, 윤동주가 재학했던 동경의 릿쿄대학에서는 매해 2월 ‘윤동주 추모일’이 다가오면 대강당에서 예배와 함께 강연이나 음악회, 시낭송회를 열고 있다. 약 5년 전, 나는 이 대학으로부터 윤동주 추모콘서트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족으로서 감사한 일이었지만, 또다시 아버지가 남겨 주신 아픔과 미움이 살아났다. 이에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이 행사에 가야 합니까? 거절해야 합니까?”
故 하용조 목사님이 일본을 품자는 취지로 시작하신 ‘러브소나타’가 30여 차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참여 요청이 있었음에도 나는 한 번도 그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 미움 때문에 그곳에서 봉사는 했을지언정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때 주님이 내게 질문하셨다.
“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그가 일본을 용서했겠니?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겠니?”
윤동주는 살아생전 시를 통해 고백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 中)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 中)
내가 윤동주 시인의 유족임을 아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이 내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용서를 구하곤 한다. 일본 북해도부터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600여 개의 윤동주 동호회가 있다.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추모일이 되면 그들은 “윤동주의 시는 그 시인의 모국어로 낭송해야 한다”며 우리말을 배운 뒤 울면서 그의 시를 낭송한다. 살아생전 윤동주는 이미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릿쿄대학 윤동주 추모콘서트에 참여했고, 그 자리에서 고백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습니다. 내가 그동안 여러분을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윤동주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일본 땅에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해, 유족 중 하나인 저에게 그토록 미안해 마십시오. 만약 윤동주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그는 여러분을 용서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평생 닮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이 땅에 있었던 실제 역사이다. ‘러브소나타’의 목적과 방법도, 그 열매도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 자신을, 가족을, 자녀를, 이웃을, 나라를, 더 사랑하길 바란다. 윤동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용서’라는 얼굴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가수는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직업이지만, 일부는 관객들을 수입의 배경으로만 삼고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환호성과 박수, 열성적인 합창이 나를 기쁘게 해주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숱한 사랑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고 부와 영광을 차지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사랑 연기를 잘했던 어느 여배우는 누가 쓴지도 모르는 악성 댓글에 끝내 목숨을 끊었다. 두 번째 곡의 음반 판매 실적이 저조해 그 상처로 세상을 등진 가수도 있다. 감동적인 연기와 노래로 사랑을 표현하던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도, 해보지도 못한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죽음의 문턱에 다가섰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치욕스럽고, 죽고만 싶던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조명이 화려한 무대에 서 있는 내게 오셔서 “참 잘하고 있구나, 내가 네게 준 목소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구나. 내가 무척 기쁘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고통 속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 발을 씻겨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비로소 나는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값없이 받은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려 한다. 나의 지친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손을 내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들이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그분이 나를 씻어 주신 것처럼, 모두의 발을 씻어 주실 것이며, 나를 살리신 것처럼, 모두를 살리실 것이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의 온기가 서로에게 스미는 믿음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80년 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쓸쓸하게 숨져 간 나의 형님, 윤동주 시인이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고대한다.
/ 윤형주 장로(서초B공동체)
“주님, 제가 이 행사에 가야 합니까? 거절해야 합니까?”
故 하용조 목사님이 일본을 품자는 취지로 시작하신 ‘러브소나타’가 30여 차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참여 요청이 있었음에도 나는 한 번도 그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 미움 때문에 그곳에서 봉사는 했을지언정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때 주님이 내게 질문하셨다.
“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그가 일본을 용서했겠니?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겠니?”
윤동주는 살아생전 시를 통해 고백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 中)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 中)
내가 윤동주 시인의 유족임을 아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 사람들이 내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용서를 구하곤 한다. 일본 북해도부터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600여 개의 윤동주 동호회가 있다.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 추모일이 되면 그들은 “윤동주의 시는 그 시인의 모국어로 낭송해야 한다”며 우리말을 배운 뒤 울면서 그의 시를 낭송한다. 살아생전 윤동주는 이미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릿쿄대학 윤동주 추모콘서트에 참여했고, 그 자리에서 고백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습니다. 내가 그동안 여러분을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윤동주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일본 땅에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해, 유족 중 하나인 저에게 그토록 미안해 마십시오. 만약 윤동주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그는 여러분을 용서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평생 닮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이 땅에 있었던 실제 역사이다. ‘러브소나타’의 목적과 방법도, 그 열매도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 자신을, 가족을, 자녀를, 이웃을, 나라를, 더 사랑하길 바란다. 윤동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용서’라는 얼굴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가수는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직업이지만, 일부는 관객들을 수입의 배경으로만 삼고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환호성과 박수, 열성적인 합창이 나를 기쁘게 해주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숱한 사랑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고 부와 영광을 차지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사랑 연기를 잘했던 어느 여배우는 누가 쓴지도 모르는 악성 댓글에 끝내 목숨을 끊었다. 두 번째 곡의 음반 판매 실적이 저조해 그 상처로 세상을 등진 가수도 있다. 감동적인 연기와 노래로 사랑을 표현하던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도, 해보지도 못한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죽음의 문턱에 다가섰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치욕스럽고, 죽고만 싶던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조명이 화려한 무대에 서 있는 내게 오셔서 “참 잘하고 있구나, 내가 네게 준 목소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구나. 내가 무척 기쁘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고통 속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 발을 씻겨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비로소 나는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값없이 받은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려 한다. 나의 지친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손을 내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들이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그분이 나를 씻어 주신 것처럼, 모두의 발을 씻어 주실 것이며, 나를 살리신 것처럼, 모두를 살리실 것이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의 온기가 서로에게 스미는 믿음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80년 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쓸쓸하게 숨져 간 나의 형님, 윤동주 시인이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고대한다.
/ 윤형주 장로(서초B공동체)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