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누가복음 13장 10~17절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재훈 목사
무엇인가에 매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상처, 실패로 인한 절망, 죄악의 습관이 우리가 전진하는 것을 막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매임으로부터 풀어져야만 전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매임의 근본원인은 사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매임에 묶여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매임이 있고, 보이지 않는 매임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매임은 폭력과 착취, 억압과 질병 등입니다. 보이지 않는 매임은 생각입니다. 사고방식과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은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세계관은 안경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세계관을 받아 들이냐에 따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결정됩니다. 세계관은 보이지 않는 매임이지만 삶을 붙잡고 있는 무서운 매임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를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묶어 놓은 최대의 무기는 죽음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무덤 속에 가두려고 노력했지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매임에서 풀려나 우리 모두를 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매임에서 풀어졌는데 세상 어떤 매임이 우리를 가둘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어떤 매임에서도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던 중 18년 동안 병에 매여 있던 여인을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풀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16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과거의 상처, 질병, 죄악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때 나타난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친 날이 주로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사건이 일곱 번 나옵니다. 대개 예수님은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통해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느 장소에서 주도적으로 병을 고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겪게 된 계기도 안식일에 병을 고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려움을 자초한 것입니다. 고난을 자초한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습니다.
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느냐?
예수님이 의도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켜 사람들이 주목하게 만든 사건은 안식일의 문제였습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심한 시발점이 나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다가갔습니다. 병자가 먼저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병자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병이 낫기를 바라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 병자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실 병이 낫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병이 오래되다보니 낫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된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유대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을 비판했습니다. 안식일에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느냐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은 38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사람들 모두가 그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38년 만에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판했습니다.
잘못된 제도와 해석 바로잡기 위한 도전
38년 동안 매어있던 질병으로부터 낫게 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쳤습니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은 당시 유대사회를 묶고 있는 보이지 않은 매임을 풀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묶고 있는 매임은 잘못된 해석과 세계관 그리고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이었습니다.
당시 사회 지도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제도를 파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온한 사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사람으로 봤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보편적 질서에 제동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슈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무엇인가를 깨뜨리고, 파괴하고, 도전하는 것이 옳다고만 하면 이념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비춰졌을까요. 유대사회를 묶고 있는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잘못된 해석을 기초로 만들어진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제4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잘 지킬 것인가를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안식일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모두 부정적인 접근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안식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열심히 봉사는 하는데 돌이켜보면 주님을 빼먹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잘못 지킴으로 말미암아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기적을 통해서 당시 잘못된 제도와 해석을 바로잡기 위한 도전을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님의 행위를 일로 간주해서 안식일에 규례를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병에서 해방되었다”
“거기에는 18년 동안 병을 일으키는 영에게 시달리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허리가 굽어 똑바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보고 앞으로 불러내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네가 병에서 해방됐다!’” (11~12절).
예수님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 여인에게 주목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18년 동안 병을 일으키는 영에 사로잡혀 허리를 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질병이 악의 영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병은 자신의 잘못된 습관이나 유전적 요인이 원인입니다. 악의 영에 의한 질병도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악의 영에 의한 질병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악의 영에 의해 육체가 망가져 있었습니다.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한 채 회당에 참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주목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만 집중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의 삶을 주목해 보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지켜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이 무엇에 매어있는지를 주목해 보십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앞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병을 낫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고,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을 앞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병에서 해방되었다”
왜곡된 종교적 감정
바로 그때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회당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책임자입니다. 회당장은 유대사회의 중요한 지도자중 한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회 지도층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세계관과 가치관, 역사관을 가르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회당장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화가 난 회당장이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일할 날은 엿새나 있다. 그러니 그날에 와서 병을 고치고 안식일에는 하지 마시오’”(14절).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자 회당장이 분노했습니다. 우리는 회당장의 분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사람은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제도나 규례가 무너지면 분노합니다. 꼭 지켜야 하는 것을 성실하게 행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방해로 그것이 깨지면 화가 납니다.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분노보다 먼저 일어나야 할 감정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18년 동안 앓아오던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면 놀라야 합니다. 가장 먼저 여인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에 반응해야합니다. 기적에 대한 경외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어서 이러한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물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었다면 아마 분노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당장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할 감정은 일어나지 않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도가 깨어진 것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회당장은 자신들이 만든 제도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만큼 종교적 감정은 왜곡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왜곡된 분노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종교적 감정은 유대사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도 안식일의 규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아이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북미대륙에 건너온 청교들도 무자비한 안식일제도를 시행했습니다. 1650년 뉴헤븐에서 제정된 법에 의하면 주일에 도둑질을 한 사람은 엄벌이 내려졌는데 처음 도둑질을 할 때는 귀를 하나 베고, 두 번째 경우에는 다른 쪽 귀를, 세 번째는 사형을 내렸다고 합니다. 왜 세 번째는 사형입니까. 더 자를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형이 언도된 적은 없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의 법이 왜 이렇게 엄격하게 했을까요. 죄에 합당한 형벌보다 과도한 종교적 분노를 법에 실은 것이 아닐까요. 도둑질하는 것을 벌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벌의 경중에 종교적 분노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1667년 보스턴 의회는 열 가정마다 한 사람씩 경찰과 동일한 권한을 부여해서 가정을 수색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색출하고 체포하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1741년에는 주일에 길거리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은 벌금을 냈습니다.
여러분, 왜곡된 감정으로 인한 제도를 진심으로 믿고,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국교회도 잘못된 종교적 감정에 치우친 것은 없는지 냉철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를 만든다
예수님이 이 회당장의 반응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황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끌고 나가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풀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15~16절).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위선은 윤리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회당장의 위선은 윤리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위선입니다. 이 위선은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집단 문화적인 위선입니다.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위선은 목적을 잃어버린 형식을 고수할 때 생깁니다. 그들은 이유를 잃어버린 제도를 고수하고자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왜 안식일을 지켜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지킬 것인가만 고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유를 모르고 행하는 관습이 많으면 잘못된 제도일 수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집단적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화적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항상 ‘왜’라는 질문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방법을 찾는 가장 좋은 길은 그것을 왜하는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를 만들어 냅니다.
진정한 생명의 길
당시 사람들은 18년 동안 병에 갇혀 있던 여인이 자유케 된 사건을 보고도 안식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죄했습니다. 집단최면에 걸린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데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18년 동안 병에 사로잡힌 영혼에 대해서는 긍휼과 절규를 하지 않는 위선에 빠져 있습니다. 위선이 꼭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것도 위선입니다.
회당장이 분노한 이유는 당시 사회가 옳다고 믿는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분노했습니까. 한 영혼이 사탄에게 매여 있는 것을 분노했습니다. 우리가 분노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제도가 무너지거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너질 때 분노해야합니까. 아닙니다. 사회전반에 깔려 있는 사탄의 매임에 대해 분노해야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분노, 자비로움에서 비롯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 병에 매어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분노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셨습니다. 율법의 존재이유는 사랑입니다. 율법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말살시키고 착취하는 제도가 되었다면 그 제도는 무너져야합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붙인 죄목은 안식일의 파괴자였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생명의 길은 매이는 것이 아니라 매임을 푸는 것입니다. 매임이 풀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회당장의 위선적 분노가 없는지를 살펴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집단 문화적 위선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점검해야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율법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증거하도록 하옵소서.
주님의 임재 하심으로 매인 것을 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