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내 갈 길을 가리라
마땅히 내 갈 길을 가리라
이재훈 목사
역사를 건강하게 변화시킨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발견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어떠한 대가와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담대하게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것을 소명이라고 한다면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이루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명만 있어도 안 되고, 용기만 있어도 안 됩니다. 소명과 용기 둘 다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유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소명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명과 상관없이 사는 인생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소명은 지문과 같습니다. 똑같은 지문이 없듯이 동일한 소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소명은 자신의 직업과 같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세상 속에서 정착하기 위해 직업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는 것은 직업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업과 상관없는 소명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가식의 짐에 사로잡히면 소명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 때 인생이 헛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소명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너무 많은 일을 짧은 생애에 이루려고 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소모합니다.
소명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소명은 은퇴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발견한 소명을 담대하게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알지만, 용기가 없어서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두려운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능력과 관심, 사랑과 용기를 주십니다.
잔인하고 포악한 정치지도자 헤롯
오늘 본문에는 소명과 용기가 충만한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용기는 모범입니다. 우리 삶의 원리가 되어야합니다.
“그때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31절).
여기서 발견한 사실은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예수님을 존경했고,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 정보를 예수님께 알려 준 것을 보면 분명 그들이 예수님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고쳐 줄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이 되면 내 뜻을 이루리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나는 마땅히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을 수 없는 법이다”(32~33절).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가끔 신랄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여우’라는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은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했습니다. 헤롯의 간교하고 교활한 모습을 지적하기 위해 여우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당시 권력자들과 충돌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는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헤롯 대왕 이후 네 명의 분봉왕이 유대지역을 분할해 통치했는데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의 죄를 지적한다는 이유로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잔인하고, 포악하고, 교활하고, 간교한 악한 정치지도자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여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를 여우라고 표현한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여우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의 죄악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향하여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해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죄악을 동물에 비유해서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시간과 상황의 주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더욱 담대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과 내일 셋째 날’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것은 매우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의 계획을 미리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헤롯에게 예수님이 삼일 동안 무엇을 할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메시지지가 무엇인지 살펴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시적이면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통찰력 있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우리 뜻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계획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면 어떤 인생을 살겠다고 계획해도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일도 장담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내일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천재지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둬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상황에 이끌려 가는 분이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고, 상황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간에 얽매이거나 상황에 이끌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 삼일 째
어떠한 위협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귀신을 내쫓는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삼일 째’라는 단어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사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소명은 모두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할지라도 계획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은 또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어법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만 죽은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 밖에서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가장 종교적인 도시, 하나님이 택하신 도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도시, 하나님을 가장 공경해야 될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데 앞장서는 도시가 되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차 당신도 예루살렘에서 죽임 당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담대함
헤롯과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주님의 계획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담대하게 소명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피하고 싶고, 피해야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에게 죽음은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계획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죽인 악인들의 책임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택하셨다고 해서 주님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악하게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로운 길을 담대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소명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바리새인들이 헤롯이 죽이려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고, 사도바울에게는 성령님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고난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지만 사도바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 증거해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 23~24).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성령께서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면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피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령님이 ‘가거나 가지 말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님의 음성을 피하라는 메시지로 듣지 않고 더 담대하게 나아가는 용기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다른 시각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앞에 놓여있는 고난이 훤히 보이는데도 담대하게 소명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희생과 대가가 있다 할지라도 소명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용기가 있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보여준 것입니다.
헤롯은 여우, 예수님은 암탉
대중의 인기, 자신의 위치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소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소명을 깨닫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명을 이루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담대한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얼마나 너희 자녀들을 모으려고 했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보라! 이제 너희의 집은 황폐한 채로 남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은 복이 있다’라고 말할 때까지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34~35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님의 담대한 용기는 사랑과 긍휼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따뜻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암탉으로 비유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동물 비유가 두 개 나옵니다. 헤롯은 여우이고, 예수님은 암탉입니다. 암탉을 죽이려는 여우가 닭장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왜 암탉으로 비유했을까요. 출애굽기에 보면 독수리로 비유했습니다. 호세아서에는 표범과 사자로 비유했습니다. 얼마나 용맹한 동물들이 많습니까. 여우를 도망가게 할 수 있는 동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여우에게 당하는 암탉으로 예수님을 비유하시니 얼마나 약해 보입니까. 그런데 이 비유에는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암탉으로 비유한 이유는 예수님은 헤롯같이 무력으로 쓰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당시 정치 지도자들 같이 무력으로 충돌하려고 했다면 당신을 호랑이나 사자로 비유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
암탉은 여우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끼를 품는 데는 최선을 다하는 동물입니다. 달걀을 품고 부화시켜 키우는 암탉처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품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여우는 암탉을 물어뜯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암탉은 자기 새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정치가들과 싸우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능력이 없는 존재처럼 죽임을 당했습니다. 암탉은 무서운 발톱도 없고, 여우와 싸울 수 있는 이빨도 없습니다. 새끼들을 품는 날개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여우에게 붙잡혀 죽는 암탉처럼 연약한 존재처럼 보였지만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발톱과 이빨로 물어뜯어 이긴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정치력으로 싸워 이긴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억울하게 죽임 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승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암탉으로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과 유대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는 예루살렘을 끝까지 품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에서 예수님의 용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소명을 발견한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소명을 따라 담대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됩니다. 고난 앞에 좌절하기보다 유혹 앞에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유혹이 고난보다 먼저 옵니다.
고난이 올지라도 소명을 따라 사는 인생이 적은 것은 고난이 오기 전에 유혹 앞에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의 고난이 오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과 유혹이 먼저 왔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유혹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유혹에 무너집니다. 유혹을 통과한 사람이 고난 속에서 소명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고난을 피해 갈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유혹을 먼저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혹을 이기고 나면 고난이 올 것입니다. 고난도 소명을 따라 승리하며 나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마땅히 내 길을 가야 합니다. 마땅히 가야 될 길이라면 어떠한 희생과 고난이 있더라도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소명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예수님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땅히 갈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마땅히 가야 될 길이라면 어떠한 희생과 고난이 있더라도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입니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