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더해 주소서
이재훈 목사
“믿음은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종의 고백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 기도제목은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입니다. 이 기도제목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더 큰 믿음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안에 있는 불신과 의심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의 마음을 채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믿음이 아니라 큰 시련을 능히 이기는 믿음을 더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해야합니다. 만약 이 기도제목이 사라졌다면 믿음이 연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깊은 믿음을 갈망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믿음은 쓰레기 더미 위에서 저절로 자라는 잡초가 아니라 하늘에서 자라난 식물로, 이것은 거룩한 돌봄으로만 자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해야 자랍니다.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셔야 더 깊은 믿음이 생깁니다.
사도들이 간청할 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해도 이 뽕나무에게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겨라!’고 하면 그 나무가 너희에게 순종할 것이다”(6절).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겨자씨 한 알은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외형적으로 작은 씨앗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의 크기보다 생명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씨앗은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아 보이는 씨앗이지만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씨앗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믿음 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력이 있다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러분,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 해도 절대로 씨앗을 만들 수 없습니다. 씨앗의 성분을 조사해서 씨앗의 성분을 만들 수는 있지만 씨앗 안에 있는 생명력은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력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저서 <믿음은 기다림으로 완성됩니다>를 읽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믿음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기적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큰 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믿음은 내면의 생명력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생명력이 있는 믿음의 씨앗에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진다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순도가 100%가 되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활동이 믿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믿음 없는 활동도 많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활동하려는 시도도 많습니다. 믿음의 순도 100%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때 내 믿음의 순도가 100%인지, 내 안에 생명력이 있는 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만약 믿음의 순도가 100%이고, 믿음에 생명력이 있다면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에 던지라고 해도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가져오는 놀라운 기적을 연상하게 합니다. 산에 있는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지는 일은 자연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기적을 만든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또 그런 일들을 이룰 수 있는 믿음도 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사람이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 낫기도 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 심겨진다’는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주어졌는지를 살펴봐야합니다. 사도들이 왜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청했는지도 맥락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절에서 4절까지 죄와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자에게는 징벌이 있지만,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루 일곱 번 회개해도 일곱 모두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히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용서해달라는 간청 앞에 ‘믿음을 더해주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간구는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까.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용서하라는 말씀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육신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들의 믿음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를 하려면 지금의 믿음으로는 안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 심겨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뽕나무가 땅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 용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미움, 불신, 원망, 상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뽑아 바다에 던져야 참된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믿음의 문제
용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믿음이 산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진다고 하셨습니다. 두 말씀 모두 용서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을 옮기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육신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산이 옮겨지는 일은 외부에서 일어나기 전에 내면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마음속에 있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어지면서 산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용서를 가로막는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던져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믿음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더 큰 믿음이 더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합니까.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회개해도 언제든지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일곱씩 아니 일흔 번씩 회개해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은혜의 길, 사죄의 길, 은총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산도 옮겨질 것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때는 이런 믿음을 간구해야 합니다. 물론 기적도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자굴에 던져진 상황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자굴에 던져지거나 불속에 던져지는 핍박과 곤란한 상황 속에 있다면 사자의 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사자굴에 던져질 위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과 갈등과 분노 상황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사자굴 보다 더 큰 시련입니다.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육신의 본성으로는 이길 수 없는 원한과 불평, 상처의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용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대상자가 회개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에 던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빠지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뻔하고,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믿음으로 뽕나무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다윗도 사울로부터 위협을 받았지만 두 번씩이나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분노의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에 던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해 줬을 뿐만 아니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원한의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던져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 아닙니까. 믿음이 가져다 준 진정한 역사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할 때 나를 짓누르고 있는 뽕나무와 산이 옮겨집니다. 미움과 분노의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렸다는 것은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유되고 변화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은혜가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는 기도제목 속에 숨어 있습니다.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는 사도들의 기도에 예수님의 또 한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더해져서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이들에게 겸손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겸손이 믿음의 중요한 증거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종의 비유입니다. ‘어떤 종이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왔는데 주인이 수고했으니 앉아서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일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종에게는 식사를 준비하고 자신이 식사할 동안 시중을 들라고 했습니다. 명령대로 행한 종에게 주인은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는 주인이 어떻게 하면 종을 괴롭힐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악하다고 평가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당시 주인은 종을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권이 무시되는 시대에 종이 해야 될 일을 했다고 주인이 감사의 표현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이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이 주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참된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대로 다 마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10절).
예수님은 참된 종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서 믿음이 강해지고,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용서하는 믿음을 체험하고, 인생이 뒤집어 지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어도 절대로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의 완성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겸손
여러분, 믿음은 겸손으로 완성됩니다. 놀라운 믿음, 큰 믿음, 주님이 더해주시는 믿음으로 용서와 위대한 헌신을 했다 할지라도 늘 겸손해야합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 더해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날마다 믿음이 쌓인다면 마음이 점점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믿음이 강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고집이 세지는 경우 때문입니다. 믿음과 고집은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엄청난 자기 확신을 합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대립이 있는 것을 보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싸웁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더해졌는데 왜 대립이 일어날까요. 믿음처럼 보이는 고집과 교만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만이 더해질까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역사와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를 체험하고 나면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분명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 교만해 집니다. 어떤 믿음의 역사도 체험하지 못하고, 변화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영적 교만은 믿음의 역사를 체험했을 때 생깁니다. 자기 확신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종의 고백처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가지 못하면 믿음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믿음이 더해집니다. 우리가 왜 이런 종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구속 받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더해질수록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은혜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어떠한 섬김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면서 섬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상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고백이 날마다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갈 2:20)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이 더해질수록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위대한 믿음의 역사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쓸모없는 종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더해지면 질수록 더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무너지고, 뽕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산이 옮겨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변화되지 않은 성품이 변화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변화되었다고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고 낮아지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십시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고 간청한 사도들의 기도에 담긴 내용입니다. 날마다 이 기도제목을 품고, 믿음이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용서할 믿음도, 용서받았다는 믿음도 부족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먼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뽕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내 마음을 막고 있는 산을 움직이게 하옵소서.
더욱 낮아지고 겸손하게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리 김남원 부장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