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재훈 목사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비유’에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를 보고 불쾌해하는 맏아들이 나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대개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맏아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맏아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비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아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회개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의도와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맏아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합니다.

맏아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여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1~3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아버지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왜 비난했습니까. 예수님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식사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과 식사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장, 예물을 드리는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마치는 제사입니다. 식사가 있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과 잔을 나눠주면서 자신이 곧 구약의 제사에 나타난 화목제물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성찬은 죄인 된 인간이 화목제물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의 제사입니다. 먹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내는 분이 아니라 함께 식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종교적 논리에 따른 분노

“그런데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음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어 보았다. 하인이 대답했다. ‘동생이 왔습니다. 동생이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와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 그를 달랬다.”(25~28절).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왔기 때문이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방탕하게 살다 돌아 온 둘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기만 했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분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세리들과 죄인들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악하게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도 한 순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범한 오류에 빠질 수 있고,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비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악인으로 치부하는 순간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오류에 빠졌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살찐 송아지를 잡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푼다는 규정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잔치까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종교적 논리였습니다. 큰 아들에게도 종교적 논리에 따른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는 깨닫기 어렵다

맏아들이 들에서 일하다 집에 왔는데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있고, 집안에 있던 큰 아들은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요. 아버지의 은혜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잘못된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로 볼 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행동은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분노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한 순간에 하나님이 잘못된 일을 행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종교논리입니다. 종교적 논리를 가지고 살아가면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큰아들의 분노에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한 이면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 노릇 하고 무슨 말씀이든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녀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9~30절).
맏아들이 아버지가 잘못된 은혜를 베푼 다고 생각한 이유는 잘못된 자화상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기쁘게 일한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보상심리가 가득했습니다.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맏아들은 동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보지도 않고 정죄했습니다. 물론 그 동생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상이나 추정으로 동생이 그렇게 행동 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나는 무슨 말씀이든지 어긴 적이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과장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모자녀관계가 아니라 종과 주인의 관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노예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세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인색하다고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마땅한 반응, 마땅한 감정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31절).
잘못된 자화상은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 하나님의 풍성한 유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잘못된 자화상이 생기고,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오류에 빠집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불평과 왜곡된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조금도 분노하거나 야단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만 환영해주는 것처럼 보이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큰아들도 달래면서 끌어안고 축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들만 사랑한 분이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헤롯도, 빌라도도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군병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차별이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그를 잃었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32절).
여러분에게도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맏아들처럼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반응이요, 마땅한 감정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해야합니다.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반응이요, 마땅한 감정입니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