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당신이 죽은 1분 후

당신이 죽은 1분 후

이재훈 목사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묘비에 ‘내 곁을 지나간 낯선 이여! 잠시 멈추어 서십시오. 나도 한때는 지금의 당신과 같았습니다. 언젠가 당신도 지금의 나와 같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준비하고 나를 따르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문구를 본 어떤 사람이 그 아래에 ‘나는 무턱대고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어느 길로 갔는지 알기 전까지는’라는 문장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만 실제로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스쿨을 개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지는 알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 어떻게 될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삶을 커튼 뒤에 숨어 들여다보는 시도를 많이 합니다. 일시적으로 죽었다 소생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음을 커튼 뒤에서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매우 위험합니다. 아주 부분적인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자이야기

죽음 이후 일어날 일을 가장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확실하게 죽었습니다.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은 1분 후 일어날 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죽은 1분 후 어디로 갈지 알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가 죽은 1분 후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죽은 1분 후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부자라고만 하신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부유함이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생에 대한 평가가 오직 부자라는 단어뿐이라는 것이 비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죽으면 애도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합니다. 좋은 친구, 훌륭한 아버지, 훌륭한 시민, 애국자, 선한 일을 했다 등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는 부자라는 단어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에게 부자라는 단어밖에 쓰지 않았을까요.
그는 항상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당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왕족들이 입는 최고급 옷이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항상 그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다 입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그는 날마다 잔치를 즐겼습니다. 어쩌다 한번 의미 있는 잔치를 여는 것이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의 집 대문은 평범한 대문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대문이었습니다. 그가 사는 집, 먹는 음식은 최고급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부자라는 것 밖에는 평가할 것이 없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이야기

반면 부자의 집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있었습니다. 우리말성경에는 그냥 있었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동댕이쳐져 있었습니다.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경멸을 온몸으로 받았습니다. 그가 입은 옷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상처가 그의 몸을 덥고 있었습니다. 아마 영양실조 상태에서 피부병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가 먹는 음식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였습니다. 그것도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문 앞 길거리에 버려진 그에게는 사람이 아닌 개들이 찾아왔습니다. 개들이 나사로의 상처를 핥아 증세를 더 악화시키곤 했습니다. 나사로는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짓밟힌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에게는 부자가 가지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름이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말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합니다. 그냥 부자와 거지로 설명해도 될 텐데 부자에게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거지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부자가 이름이 없었겠습니까? 그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거지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부여하심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 없는 이름이 거지에게 있었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

이름을 부른다는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면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예수님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지에게 나사로라는 이름을 부여해주셨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거지에게 왜 이름을 부여했을까요.
나사로라는 이름에 그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구약의 ‘엘리아살’이라는 이름과 어원이 같습니다. 둘 다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극심한 가난과 질병, 고통과 버려짐 속에서도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름을 부여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불평등은 평등으로 끝날 때가옵니다. 그때는 바로 죽음의 때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위대한 평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죽음은 왕이 가진 지팡이나, 농부가 가진 삽을 동등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누가 먼저 죽었습니까? 거지 나사로입니다. 못 먹고 병들었으니 먼저 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부자도 죽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편한 곳에 쉬던 사람도 죽었습니다. 사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죽음으로 평등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람이 죽은 뒤 1분 후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반대의 결과

첫째, 죽은 지 1분 후 모든 것이 평등하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정반대 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음은 평등뿐만 아니라 인생의 위대한 역전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나중에 그 거지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다.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다”(22~23절).
거지 나사로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왜 하나님 품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품을 아브라함 품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하데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장차 영원히 멸망에 처할 지옥과 다른 중간상태의 지옥을 의미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을 거역한 영혼들이 거하는 상태를 유대인들은 ‘하데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세 카톨릭이 말하는 연옥과 다릅니다. 중세 카톨릭이 말하는 연옥은 출구가 있습니다. 연옥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출구가 있지만 하데스는 출구가 없습니다.
문제는 천국과 지옥사이에서 대화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상태에서 대화가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하데스 상태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각기 다른 운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위대한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지나치게 부(富)에 집착해 생긴 병

“그가 아브라함에게 외쳤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그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 찍어서 제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24절).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호소했습니다. 살아있을 동안 굶주리고, 헐벗고, 연약했던 나사로를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던 그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혀끝에 물 한 방울을 축여달라고 호소합니다. 부자는 지금 물 한 방울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산해진미를 음미하였던 부자의 혀가 불같은 고통 속에서 타들어 가면서 물 한 방울로 시원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부자의 혀가 고통스러웠을까요. 죄에 대한 징벌은 모든 육체에 주어질 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가 하나님과 사람들을 저주하며 혀의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은 지 1분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함을 필요로 하는 자임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해야합니다.
긍휼의 시대는 정해져 있습니다. 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이 죽음 이후 정반대가 되었을까요. 부요함 자체가 고통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나사로를 아브라함에게 인도한 것도 아닙니다. 지나치게 부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과 환경의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면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살았습니다. 그의 순수한 믿음이 천국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죽은 1분 후 일어날 일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얘야, 네가 살아 있을 때를 기억해 보아라. 네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받는 동안 나사로는 온갖 나쁜 것만 다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25절).
부자는 살아 있을 때 온갖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만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는 동안 내세에서 영원히 누릴 좋은 것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내세에서 나쁜 것을 얻는데 사용했고, 거지 나사로는 살아있을 때 나쁜 것만 받았지만 내세에 좋을 것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나쁜 것만 받았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육신이 나쁜 것을 벗을 때가옵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에 안주하고, 자기 집착에 빠지면 안 됩니다. 단지 부자였다는 평가를 받는 인생을 산다면 장차 준비될 더 좋은 것을 얻지 못하고 나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은 1분 후 일어날 일입니다.
둘째, 인성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몸은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히지만 우리의 정신은 더 분명해집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알아봤습니다. 문 앞에 있던 나사로도 알아 봤습니다. 자신의 형제가 다섯 명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죽은 지 1분 후에도 지성, 의지, 인성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부자의 교만한 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도 자기가 권위가 있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부릴 수 있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되돌아올 수 없는 여행

우리가 죽은 1분 후에는 전혀 다른 운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부자는 바뀐 운명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부자의 자기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혀끝을 시원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왜 고통 받고 있는지 그 원인을 찾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부자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느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섬세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지옥이 왜 지옥입니까. 만약 지옥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이타적인 삶으로 변화된다면 그곳이 지옥일까요. 본문에 나온 부자를 보십시오. 하데스의 고통 속에서 회개했습니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지옥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 중심으로 빠져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지옥은 이기심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죽은 1분 후 다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영원한 길로 들어섭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어 여기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거기서도 우리 쪽으로 건너올 수가 없다”(26절).
우리가 죽은 1분 후 취소할 수 없는 여행, 되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납니다.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확실히 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 자신의 형제들이 고통스런 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형제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가야만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1분 후를 준비하는 사람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이 실제로 언제 일어났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착각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기록된 증거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죽은 1분 후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증거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1분 후 운명이 어떻게 변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말씀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면 나사로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에 등장한 부자와 같은 운명이 됩니다. 우리가 죽은 1분 후를 말씀을 통해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귀한 비유를 통해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죽은 1분 후 어떠한 운명에 처해지게 될지는
이 땅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미래에 더 좋은 것을 준비할 수 있도록 안도하옵소서.
이 땅에서의 삶이 부유하거나 가난하든지 간에
영원한 나라의 축복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죽은 1분 후를 말씀을 통해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