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의 대가
제자도의 대가
이재훈 목사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 대중의 인기입니다. 권력욕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자라는 독버섯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끝까지 올바른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여겼고, 빌라도와 헤롯 같은 로마제국의 권력자들로부터 유대를 해방시켜주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당신을 따라오는 무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들을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입으로만 회개했다고 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보다, 진실 되게 회개하고 고백하는 한 명의 제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양보다 질에 주목하셨습니다. 겉모양보다 본질을 추구하셨습니다. 고집보다 진실을 원하셨습니다. 그림자 같은 관중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이 있는 소수를 갈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에 만족하지 않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람의 숫자를 보고 만족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숫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 혹은 자매와 자기 생명일지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27절).
예수님은 군중들이 단순한 팬이 아니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이 한 순간에 돌변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그렇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 ‘어디로 가시든지 저희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정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무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기적, 예수님의 권능, 교훈, 신비함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무리들이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의 최우선 대상으로 놓는 것이 바로 제자가 지불해야하는 대가입니다. 가족,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자의 대가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두 번째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절).
개역개정에서는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말성경에서는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둘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왜 ‘미워하지 아니하면’ 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예수님은 부모, 처자식, 가족, 친척,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게 하는 분이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깨뜨리는 분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미워하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것은 샘족 계통 언어의 과장법입니다. 논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중요하고, 짙고, 온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미워하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미워해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면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주는 배타적인 사랑은 그 밖의 사람들에게 불행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배타적인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역사에도 무엇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아내 오정모 사모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연로하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고등계형사가 주기철 목사님에게 제안을 합니다. 위독하신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 허락하겠다. 그러나 나가서 신사참배를 죄로 정죄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하지 말라고 설교하지 말라고 회유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어머니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형사에게 ‘하겠다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뵙고 싶은 마음에 교도소를 나왔습니다. 집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오정모 사모가 남편에게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부인의 권면을 들은 주기철 목사님은 발길을 돌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갔습니다.
사모님은 왜 남편에게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라고 했을까요. 교도소에서 나올 때 일본형사의 제안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형사의 제안에 침묵하고 교도소를 나오면 그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올 바에는 차라리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남편을 미워한 것일까요. 남편보기 싫어서 다시 교도소로 가라고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미움처럼 여겨질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 정양순 사모님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1년 7개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정양순 사모님이 애양원을 지켰습니다. 사모님은 늘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보통 아내 같으면 억울하게 교도소에 간 남편을 위해 기도할 때 남편의 건강과 교도소에서 빨리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혹은 억울함을 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손 목사님 사모님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손 목사님이 신앙이 꺾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1년 7개월이 지났습니다. 만기가 지났는데도 손 목사님이 뜻을 돌이키지 않자 종신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순천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 길에서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보통 아내들 같으면 슬퍼서 울고불고 매달렸을 텐데 사모님은 성경책을 펴고 요한계시록 2장10절 말씀을 읽어줬다고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고 한 말디를 더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만약 우상에게 절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값없는 구원, 대가 있는 신앙
어느 순교자가 화형장에 끌려가는 길에서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길에서 가족들을 만난 것은 그 사람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 순교자의 아내는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아내와 다르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그렇게 고집스럽게 굴지 말고 생명이라도 살아야 될 것 아니요”
자식들도 울부짖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지 말고 엄마하고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순간 순교자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당신과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하지만 내가 온 맘으로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한다면 당신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가야만하오. 내 몸을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서 불에 태워지도록 올려 드려야 합니다.”
가족과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왜 남편에게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라고 하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조언했을까요.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당사자는 물론 가족에게도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순교를 요구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예전에 김사무엘 목사님을 통해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세례를 받을 때 한 가지 질문을 한다고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습니까?”
지금도 어딘가 에서는 세례를 받으려면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세례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를 결단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음대신 세례를 선택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 앉는 대가로 우리의 생명을 요구한다면 앉아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유롭기 때문에 제자도의 대가를 잃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진실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에는 언제나 대가가 요구됩니다. 구원받는데 대가가 요구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구원은 값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구원을 값없이 받았기에 결과가 요구됩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대가를 치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땀을 흘려 일하는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대가를 치르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집짓기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건축의 비유’입니다. 탑을 세울 때 건축비용을 계산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어떤 사람이 탑을 세우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먼저 자리에 앉아 완공할 때까지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지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 만약 기초만 잘 닦아 놓고 일을 마칠 수 없다면 보는 사람마다 비웃으며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했구나’”(28~30절).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은 신앙의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기초만 놓고 위에 아무것도 쌓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초만 놓고 탑을 쌓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 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한 기초를 놓은 후에 원하는 집을 지어야합니다. 신앙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었고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순간에 결단하는 믿음이 아니라 매일 벽돌 한장 한장을 쌓는 믿음으로 집을 지어야합니다. 우리는 어떤 집을 짓습니까. 심판의 날에 견딜 수 있는 그런 성품과 인격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십시오”(벧후 1장 5~7절).
공급하라는 것은 보충하라는 것입니다. 쌓아 올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덕이라는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덕에 지식이라는 지붕을 씌웁니다. 지식 위에 절제라는 기와를 올립니다. 인내라는 문도 달아야합니다. 경건이라는 커튼도 달고, 우애라는 소파도 놓고, 사랑이라는 식탁도 놓아야합니다. 비로소 아름다운 믿음의 집이 됩니다.
믿음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우애를,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믿음이 쌓이고 덕을 더할 때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분노와 이기심,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절제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까.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믿음에서 사랑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영적전쟁 승리의 비밀
두 번째 비유는 ‘전쟁의 비유’입니다.
“또 어떤 왕이 다른 나라 왕과 전쟁하러 나간다고 하자. 그가 먼저 자리에 앉아 1만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왕을 대항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약 승산이 없다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포기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1~33절)
만 명의 군사를 가진 왕에게 이만 명의 군사를 가진 왕이 쳐들어온다면 어떨까요. 승산이 없습니다. 판단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전쟁입니다. 싸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대에 부딪히고 갈등이 일어 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변화될 때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덕, 절제, 인내, 사랑을 세움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을 개인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만 명의 군사로 이만 명과 싸우는 것보다 더 열악한 처지일지도 모릅니다. 인정해야합니다. 정확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나는 약하다.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평가해야합니다.
전력이 부족하면 화친을 청해야합니다. 나보다 힘센 나라에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영적전쟁에서 패배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상대보다 더 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화친을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밀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지원만 의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버려야 될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습관일수도 있고, 소유일 수도 있습니다.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때로 자기의 소유까지도 내려놓고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듯이 대가를 지불해야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제자는 없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그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 내버려진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34~35절).
우리의 신앙이 짓다만 집이 되거나 영적전쟁에서 패한 신앙이 된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집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국교회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봐야합니다.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신앙의 대가를 지불하고, 영적상태를 정직하게 고백함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신앙의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믿음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제자가 되십시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