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빚진자
이재훈 목사
1889년 4월 발간된 세계적인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는 한국교회를 현대선교의 또 다른 기적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또 미국 북장로교회가 선교 25주년을 기념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보고서에 한국선교를 현대선교에서 가장 경이로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선교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100년 전에 천주교가 들어왔습니다. 천주교가 들어왔을 당시 조선조정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해도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개신교는 서방국가와 조약이 맺어진 이후에 들어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순교자 숫자가 적습니다. 이런 면에서 먼저 가혹한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켜낸 천주교 순교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는 잉크로 쓴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피로 쓴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틀린이라는 초대교회 지도자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며, 교회는 순교자의 피로 자란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순교의 피가 흘려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조선시대 초기 해외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희생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한국에 온 해외 선교사들은 매우 우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매우 헌신적인 분들이었습니다. 1885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에 온 선교사 숫자는 2,956명입니다. 그 중 상당수 선교사들이 의료선교사였습니다. 이들 중 10%는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질병과 사고로 죽었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 자녀 중에는 태어나자마자 질병에 걸려 이름도 없이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습니다.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들의 묘지가 그들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 숫자가 145명인데 그 중 65명이 선교사의 자녀입니다.
다섯 명의 선교사
이 땅에 오셨던 다섯 분의 선교사들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선교사는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입니다. 그녀는 1885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1884년 53세의 나이로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녀에 의해 이화학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버려진 여자 어린아이를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24년 동안 조선의 여성들을 구원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다 76세에 소천해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녀 나이 50세가 넘어 한국에 왔는데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William B. Scranton) 부부와 함께 왔습니다.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은 30대에 남편이 죽고 홀로 되었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잘 키웠습니다. 예일대학과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의사로 키웠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아들 내외를 헌신시켜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뉴헤븐제일 장로교회에서 파송식을 할 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제가 오늘 파송 받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혜입니다. 고난이 아니라 분에 넘치는 명예라고 믿습니다”
메리 스크랜턴과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램턴 내외의 헌신을 통해서 이 땅에 최초의 교육기관이 세워졌습니다.
두 번째 선교사는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내외입니다. 그들은 1891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약혼했고 서울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한 살 된 아이와 함께 ‘평양선교개척사역’을 위해 파송되었습니다. 윌리암 제임스 홀이 1894년 ㅤㅊㅕㅇ양에서 청일 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부부가 한국에 온지 3년 만에 윌리엄 제임스 홀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아내 로제타 홀은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스물아홉 나이에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둘째 딸을 낳고 1897년 다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병원을 세우던 중 딸마저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로제타 홀은 선교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4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로 가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16년 동안 의료선교사역을 했습니다.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퇴치운동을 시작한 분입니다.
유진 벨과 윌리엄 포사잇 선교사
세 번째 선교사는 유진 벨(Eugene Bell)입니다. 그는 1895년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나주지역 선교책임자로 사역하다 추방당했습니다. 그 후 목포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1901년 부인과 두 자녀를 두고 내륙지방으로 선교여행을 갔는데 그때 부인 로티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는 부인의 시신을 양화진에 묻고, 두 자녀를 미국에 있는 여동생에게 맡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03년에 정명여학교 영어학교를 설립하고, 1904년에 광주에 선교부를 세웠습니다. 1908년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도 세웠습니다. 1914년도에는 조선예수교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가렛 선교사와 재혼했는데 두 번째 아내도 수원 병점 부근에서 사고로 죽었습니다.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롯은 군산에서 일하던 린튼 선교사와 결혼해 50년 동안 교육사역을 했습니다. 그들이 세운 대학이 바로 1954년에 개교한 한남대학교입니다. 린튼의 후손들은 지금도 ‘유진벨 재단’과 ‘조선을 위한 크리스천 벗들’이라는 단체를 세워 북한의 결핵퇴치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선교사는 윌리엄 포사잇(William Forsythe)입니다. 그는 1904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전주와 목포에서 의료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시간만 나면 거리로 나가 거리전도를 했습니다. 전주에서 전도하던 중 납치되어 귀가 잘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극진히 돌봤습니다. 어느 날 전남지역 동료 선교사가 급성폐렴으로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가던 중에 산모퉁이에서 신음하며 떨고 있는 한센병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환자는 손과 발은 짓물러 있었고,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엉켜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가던 말에 그 환자를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갔습니다. 그 환자를 끌어안고 옮기던 중에 환자가 짚고 있던 지팡이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옆에 있던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보면 돌을 던졌고, 가까이 가기만해도 전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와 고름이 묻어 있는 지팡이를 잡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최흥종은 한센병 환자를 끌어안고 옮기는 포사잇 선교사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최흥종은 선교사를 도와 한센병 환자를 돕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광주로 모여 들었습니다. 최흥종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천 평의 땅을 기증해 1911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한센병 진료소를 세웠습니다. 그 진료소가 나중에 장소를 순천으로 옮겨 애양원이 되었습니다.
포사잇 선교사는 헌신적으로 나병환자를 돌보다 45세에 풍토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공주에 있던 그의 기념비를 어깨에 짊어지고 보름 동안 걸어서 애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다섯 번째 선교사는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파송 간호사로 한국에 온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로 불리던 그녀는 독신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당시 가장 무서운 풍토병이었던 ‘수프르’에 걸렸습니다. 영양이 흡수되지 않아서 탈수 되는 풍토병입니다.
그녀는 광주 제중원, 군산의 구암 예수병원,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일했습니다. 간호원을 양성하는데 헌신했습니다. 곳곳에 간호학교를 세웠습니다. 조선 최초의 간호교과서를 썼고, 조선 간호부를 만들어 국제 간호학회에 가입하도록 애썼습니다. 그녀는 고아와 버려진 이들의 이웃이었습니다. 광주 양림천의 거지들을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먹여 주었습니다. 길에서 여자 한센병 환자를 만나면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밥을 먹였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를 입양해 키우기도 했습니다. 자신도 병들었는데 14명의 양자들을 입양해 키웠습니다. 모두 버려진 아이들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 중에는 식모와 유모를 고용하고 애완견 사육비까지 받아 사역하던 선교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비를 받으면 절반은 교회에 헌금하고, 나머지는 과부 35명과 양자 14명의 생활비로 썼습니다. 다른 선교사의 30분의 1정도의 생활비를 썼습니다.
그녀는 아파서도 강의했고, 죽는 날까지도 누워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1934년 미국남장로교회는 그녀의 사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선교비를 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평 선교사는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53세였습니다. 그녀는 임종 때 찬송가를 드리며 입가의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먼저 가니 천국에서 만납시다. 내가 호흡을 거두자마자 내 시체를 해부해서 연구자료로 삼으십시오.”
유품을 정리하던 친구가 그녀의 노트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좌우명이 적혀있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녀는 광주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불교신자들도 참여했고,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일본인, 서울, 평양, 부산 등지에서도 장례에 참여했습니다. 수 백 명의 양림천 거지들과 수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어머니’라고 부르짖으며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193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에 서서평 선교사에 대한 기사가 세 개 크게 실렸습니다. 그때 실린 기사 두 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93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조선교육사업에 일생 바친
빈민의 대모 서서평양 장서’
‘광주 양림동에 있는 이일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인 서서평양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조선에 들어온 이후 선교사업은 물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노력해오던 중 1922년에 이일학교를 창립하여 오금 13년 동안에 성경과 36명 과학과 37명의 졸업생을 내었으며 방금 66명의 재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이혼당한 여자,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 학령이 초과한 여자 등을 요양하고 있었는데 서서평양은 학교 창설 이래 자기 생활비일체까지 학교유지비에 바쳤으므로 사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하며 무너진 주택을 수선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오전 4시 이 세상을 떠났다는 바그의 장인은 전 광주 기독교단체 연합장으로 성대히 거행하리라고 한다.’
‘보리밥 된장국과 고무신 끌고 생활,
자기 몸과 재산을 돌보지 않고 전심력을 교육자선에’
‘별항 보도한 바의 서서평양은 그가 31세 된 25년에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오던 즉시 경성 세브란스 간호원장으로 시무하다가 기미운동에 관련했다는 까닭으로 경성에 있지 못하고 전남 광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면서 불쌍한 조선인 고아는 자신의 눈에 뜨이는 대로 데려다가 양육하며 교육하며 남은 여가 시켜준 출가시켜준 수요가 수십 명의 다수라고 한다. 1922년 이일학교를 설립하였으나 특별한 재원이 없었던 까닭으로 자신의 생활비로 전부를 충당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은 조선 농촌여성과 같이 무명베의 옷을 입으며 고무신을 신었으며 보리밥에 된장을 먹고 살아나왔다는 바 앞으로는 이 이일학교의 존속여하가 의문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복음에 빚진 사람들
조선에 온 다섯 분의 선교사들을 소개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풍토병과 싸우고, 자녀들을 잃으면서도 한국선교를 위해 희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이 두렵지 않게 하였고,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자녀들의 자녀들에게까지 이 땅을 섬기게 했을까요.
“나는 그리스 사람이든 미개한 사람이든, 지혜로운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그 모두에게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롬 1:14~15).
빚진 마음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 사람에게 돈을 빌렸겠습니까. 빌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빚진 마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빚을 진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으면 하나님께 빚을 졌다고 하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님께 빚진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값없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갚으라고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걸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순간 아직 주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온 많은 선교사들도 빚진 마음으로 왔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역하고 있는 한인선교사들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그리스 사람이든, 미개한 사람이든, 지혜로운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던 간에 인종과 수준과 문화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빚진 사람입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부담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희생과 고통이 요구된다고 할지라도 그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구약의 열왕기하에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아람사람들이 북쪽 사마리아를 쳐들어왔을 때의 일입니다. 사마리아는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아람군대가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먹을 것이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아람군대가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문 앞에 있던 몇몇의 나병환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기 가만히 있다가 죽을 것이냐?”
성안에 남아있어도 죽을 것이고, 아람군대가 쳐들어와도 죽을 것인데 모험한 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나 여기서 죽나 똑같으니 가서 살려달라고 부탁해보자고 결의하고 아람군대진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납니다. 아람군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부리나케 도망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온 모든 군수품과 보물을 그대로 놓고 도망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이 아람군대에게 두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람군대는 엄청난 소리가 들리자 군대가 몰려오는 줄 알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갔을 때 아람군대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보석과 군수품을 챙겼습니다.
“그러다가 나병 환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하고 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잠자코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날이 밝을 때까지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바로 가서 왕궁에 이 소식을 알리자’”(열하 7:9).
정확하게 판단한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해야겠다는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한참 자기 몫을 챙기다 반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떤 말입니까. 좋은 소식이 있는데 잠자코 있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945년 해방되었을 때 소식을 듣지 못한 두메산골 사람들은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전국방방곡곡에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이것과 같습니다.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빚진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아람군대가 떠나서 이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요, 빚진 마음입니다.
땅 끝도 가야하고, 예루살렘도 가야 합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을 찾아 가야 합니다. 조선은 은둔의 나라였습니다.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에까지 복음을 전하러 왔다면 우리도 오늘 이 시대의 감춰진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받아 놓고 은둔의 나라까지 가지 않는 것은 은혜에 빚진 자가 아닙니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