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재훈 목사

‘제임스 패커’라는 신학자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을 많이 안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모르는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지식이나 감정, 혹은 어떤 의지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는 동사는 부부의 사귐과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경험과 사귐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알려주셔야 합니다. 누군가를 알아 갈 때도 그 사람이 스스로를 보여 줘야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만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친구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 삼아 주셔야합니다.
고난을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면 하나님을 알려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영의 눈이 떠집니다.

순종했는데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더 심하게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가 신하들을 불러 명령했습니다.
“백성들이 게을러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쓸데없는 말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니까 벽돌을 만들 때 필요한 짚을 제공하지 말라. 그러나 벽돌은 동일하게 생산하도록 하고 짚은 스스로 마련해서 벽돌을 만들라고 하라.”
이제는 벽돌을 재료까지 찾아 만들어야 합니다. 일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환영하겠습니까. “당신들이 바로에게 칼을 쥐어졌으니 당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저주하고 항의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완강하게 거절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백성들마저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바로에게 가서 뜻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했는데 왜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까요.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왜 이 백성들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까? 왜 하필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이후로 바로가 오히려 이 백성들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런데도 주의 백성들을 구해 주지 않고 계십니다’”(5:22~23).
모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백성들이 더 심하게 학대당하게 된 것도 안타깝고, 또 다시 백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해서 갔으면 무슨 역사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상황만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습니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항변을 불신앙이나 불평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일어나는 상황이 정반대면 당연히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시편 기자의 고백이 그런 고백입니다. 정직한 영혼은 일어나는 상황이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상황이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모세의 항변은 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호소입니다.
필립 얀시가 쓴 <하나님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하나님께 전혀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무신론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혀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마땅히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상황이 이뤄지지 않으면 큰 낙심과 실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영혼이 있다면 수많은 시편기자처럼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합니다.
모세의 실망과 절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셨습니까. 더 악화된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상황을 더 어렵게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문제를 가지고 나와 씨름하는 것 자체를 기대하셨습니다. 모세가 더 깊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더 깊이 하나님께 의뢰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이 쉽게 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기도를 배웁니다. 상황이 악화될 때도 기도를 배웁니다. 순종했는데도 상황이 풀리지 않고, 꼬이고, 매듭이 더 견고해질 때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도 상황이 악화될 때 더 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더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모세는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바로에게 가서 전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하나님이 모세에게 40년을 더 광야에서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모세가 받을 도전과 위험 그리고 위기들을 극복하려면 기도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씨름하고 호소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하나님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켰습니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둘째, 악화된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기위해서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어떻게 할지 보여 주도록 하겠다. 내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보내 줄 것이다. 내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자기 나라에서 내보내게 될 것이다’”(출 6:1).
‘내 강한 손으로’와 ‘어쩔 수 없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얼마나 능력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상황이 악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자마자 신사적으로 뜻대로 하라고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세 가지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아무런 갈등이나 고통 없이 해방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도 감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모세라는 사람이 와서 바로와 타협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거나 믿음과 기대 없이 광야에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면 쉽게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체험하지 않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둘째, 바로가 순순히 백성들을 내어줬다면 그가 위대해집니다. 백성들이 바로를 찬양하게 됩니다. 바로가 위대한 신이 됩니다. 모세도 위대해집니다. 바로를 한 번 만나서 설득한 모세를 신처럼 추앙하고 숭배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가 완악하게 거절하고 또 거절해야 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될수록 하나님의 강한 손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는 백성들을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보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아야 합니다. 바로와 모세가 위대해지지 않고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강한 손이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여러분, 경제가 더 악화됩니까. 그럴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썼는지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의 손을 의식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가 호황이면 어떤 지도자가 칭찬을 받고, 위대하다고 이야기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놓이면 하나님의 강한 손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능력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면 하나님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심으로 주님의 강한 손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갔는데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주님의 강한 손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의미를 알게 하겠다

셋째, 악화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내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출6:3).
이 구절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이름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는 알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모순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오해입니다. 여러분은 이름의 의미를 다 알고 부릅니까. 우리가 쓰는 말 중에 그 의미를 모르고 쓰는 단어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이름이 불려 진다고 해서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압니까. 아닙니다. 어린 자녀들을 불러놓고 물어보십시오. 부모들이 주님이라고 하니까 자녀들도 주님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쓰는 단어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신양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훨씬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불렸다고 해서 그 이름의 의미를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로 그들이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었다고 해도 알지 못하거나 체험하지 못한 채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세우고, 기억하는 하나님

6장 1절에서 8절까지 말씀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려고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일곱 번 나옵니다.
첫 번째, ‘나는 여호와다’라는 선언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도 ‘나는 여호와다’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나는 여호와다’라고 끝납니다. 중간에 다섯 번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조상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또 그들이 이방 사람으로 살던 곳 가나안 땅을 주리라고 그들에게 언약을 세워 주었는데 이제 이집트 사람들 아래서 종 노릇 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내가 언약을 기억했다”(출 6:4~5).
기억했다는 것은 새카맣게 잊어버렸다가 생각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계속 기억하고 계시고, 그 약속대로 행동하실 때를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약속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케 하겠다. 내가 너로 말미암아 나라들을 세울 것이며 왕들이 너로부터 나올 것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올 자손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으로 삼고 네 하나님 그리고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네가 지금 나그네로 있는 이 가나안 온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물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창 17: 6~8).
너희 자손을 크게 번성할 것이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줄 것이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분명히 알아라. 네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가 돼 그들을 섬길 것이며 400년 동안 그들은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네 자손들이 섬기던 그 민족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며 그 후 네 자손이 많은 재산을 갖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복된 노년을 보내다가 평안 속에서 땅에 묻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네 자손은 4대 만에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15:13~16).
이 말씀을 모세시대 이전에 하셨습니다.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하셨습니다. 많은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는 과정에서 일어날 일을 400년 동안 너희들은 이방 땅에서 종살이를 하며,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4대만에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나는 그 땅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4대만에 들어옵니까. 그 땅에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손이 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기억했을까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아브라함이 누군가에게 전달했겠지만 이삭과 야곱이 그 언약을 후손들에게 전달했을까요. 전달했어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400년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언약은 잊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준 언약을 기억하노라.” 언약을 세우고, 기억하는 하나님이 여호와입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여호와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꺼내 주고 그 속박에서 건져 줄 것이다. 내가 쭉 뻗은 팔과 큰 심판으로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다’”(6절).
셋째,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구원을 통해 이뤄집니다. 백성에게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대로 구원하시는 분이 여호와입니다.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집트 사람들의 압제에서 꺼내 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7절).
네 번째 다섯 번째가 7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을 것이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한 백성을 택하시고, 약속을 주시고, 기억하시고, 구원하실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 찾아오시고,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줘 너희의 유업이 되게 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다’라고 말이다”(8절).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한 영적 출애굽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는 영어로 ‘Lord’입니다. 주님으로 번역을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 건져내셨습니다. 그의 강한 손으로 건져내심이 우리의 출애굽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나님을 체험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출애굽 사건을 행하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입니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