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뚫은 종
이재훈 목사
어느 역사가가 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와 법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실제 모든 사람들과 법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성향을 풍자한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허용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러시아에서는 허용되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저는 우리나라가 상황윤리의 흐름을 급속하게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상황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윤리는 상황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윤리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윤리입니다. 성령의 열매이고, 십계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도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법을 주시기 전에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십계명도 계명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소개로 시작합니다.
“나는 너희가 애굽 땅 종 되었던 인도하여낸 여호와니라”(출 20:2).
법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법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알아야합니다.
창조목적대로 사는 것이 ‘자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법을 주시면서 은혜에 대한 반응, 은혜에 대한 책임,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주셨을까요. 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질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보물이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제 상황은 다릅니다. 그들은 아직 거룩한 민족으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광야에 살면서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보다 세상을 크게 보고, 우상을 섬기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해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체성을 먼저 부여해 주시고 나서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되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해 얻은 자유를 책임으로 전환시켜주셨습니다.
여러분, 자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답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분명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 자유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자유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많은 경험을 합니다. 모든 운동경기는 정해진 규칙을 지킬 때만 자유롭습니다. 육지에 사는 동물은 육지에 살 때 자유롭습니다. 육지에 사는 동물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이 답답하다고 육지로 올라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을 나는 새가 하늘을 벗어나고 싶어서 그 작고 가냘픈 다리로 육지를 뛰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자유로운 것입니까. 동물은 육지를 뛰어 놀아야 자유롭고, 새는 하늘을 날아야 자유롭고,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헤엄쳐야 자유롭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한과 규칙이 있어야합니다. 그 제한과 규칙을 지킬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창조된 목적대로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 목적대로 살지 못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자유를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인으로 사는 것 같지만 죽음의 종으로 삽니다. 죽음의 노예로 삽니다. 죄의 종으로 삽니다. 출애굽이란 하나님이 죄와 사망의 종 된 우리를 자유케 하신 사건입니다.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창조 목적대로 나아가야만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는 세 가지 관점
출애굽기 21장부터 23장까지는 십계명의 속편입니다. 해설편입니다. 구체적인 적용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영적 법칙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례는 종에 관한 법입니다. 당시에 ‘함부라비 법전’이 있었습니다. 이 법전에는 종에 관한 규례가 가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만큼 종을 비천하게 여기고, 가장 나중에 다루어도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법조문은 가장 먼저 종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격과 도전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사회윤리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종에 관한 법을 주신 것을 두고 종에 대해 묵인하고 인정하는 것 아니냐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종을 이렇게 대하라고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노예제도를 인정한 것 아니냐고 구약의 윤리관을 공격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많은 법과 제도들이 당시 타락한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혼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이혼증서만 주면 얼마든지 이혼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당시 타락한 사람들이 여성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막고, 여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를 두고 ‘적응’이라는 단어를 써서 설명했습니다. 부모가 옹알이를 막 시작하는 자녀와 대화할 때 어떻게 합니까. 부모도 아이와 같이 옹알이를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춘 것입니다.
또한 종을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단계를 세워서 인간과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적응’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단을 놓아주면서 이끌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합당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용납하는 경우들이 구약에 많이 나옵니다. 적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당시 이스라엘 종의 제도는 다른 제국들의 노예제도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나 후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매매하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는 노예제도와는 차별화된 제도입니다. 일종의 계약 노무자의 성격입니다. 일시적인 노동을 통해 빚을 청산하는 계약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내용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종에 대한 규례를 주실 때에는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는 그 제도가 없어지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남자종에 관한 규례
하나님은 결코 종의 제도를 창조질서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파격적인 보호와 권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문화와 제도에서는 노예의 운명은 주인에게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재산과 같습니다.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마음대로 팔수도 있었습니다. 주인의 생각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달랐습니다.
“만약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6년 동안 너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7년째에는 그가 대가 없이 자유롭게 나갈 것이다”(2절).
6년 상한제입니다. 이것은 남자종에 관한 것입니다. 6년 이상은 종살이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금액이 아무리 많고, 또 어떠한 이유에서 종이 되었든지 6년까지만 종살이를 하고 7년째부터는 대가없이 자유인이 되는 법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6년을 넘을 수 없습니다. 빚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 빚을 지면 7년씩 일곱 번 돌아오는 희년이 되는 안식년에 모든 빚이 탕감이 됩니다. 이 법은 빚을 제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동적으로 서로 간에 원한을 살만한 빚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긍휼과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기가 막힌 제도입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도 이 법을 실행할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 때문입니다. 이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지켰다면 하나님의 질서가 움직여지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평생 혹은 대대로 종이 되는 다른 나라의 노예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자유인이 될 때는 퇴직수당까지 넉넉하게 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만약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동료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다면 너는 그가 6년 동안 섬기게 하고는 7년째 되는 해에는 놓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놓아줄 때는 빈손으로 보내지 마라. 네 양들이나 네 타작마당이나 네 포도주 틀에 있는 것을 그에게 넉넉히 베풀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복 주신 것처럼 그에게 주어라”(신 15:12~14).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넉넉히 베풀라는 종에 관한 규례가 세상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며,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주신 법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법이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종의 인권이 보호되었을 것입니다. 종들도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잃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주인의 배려와 사랑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이 법은 종의 결혼관계도 존중해 줍니다. 홀로 들어왔으면 홀로 나가고, 아내와 함께 들어왔으면 함께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여자종에 관한 규례
둘째, 여자 종에 대해서는 남자 종보다 엄격하게 규정했습니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종으로 팔면 그 종은 남종처럼 자유롭게 나가지 못할 것이다”(7절).
남종처럼 자유롭게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칫 성차별로 느끼거나 여성을 더 힘들게 한 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반대입니다. 여성들을 더 배려한 법입니다. 남자들은 7년째가 되어 자유인이 되면 재산권을 가지고 살 수 있지만 여성은 재산권이 없었습니다. 홀로 되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에 대한 철저한 보호와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이상 혼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왜 여종이 되었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했습니다.
“주인이 자기가 가지려고 산 그 여종을 기뻐하지 않으면 주인은 여종을 속량해 주어야 한다. 그가 그 여종을 속였기에 이방 민족에 팔아넘길 권리는 없다. 그가 만약 자기 아들에게 주려고 산 것이라면 그는 그 종을 딸처럼 대해야 할 것이다. 딸을 대하듯 대하라. 만약 그가 다른 아내를 들인다 해도 그는 그 여종에게서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아내 되는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8~10절).
여종의 권리가 제한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타락한 문화적 틀 속에서 여종의 권리와 인생을 보호하는 장치를 여러 개 만드셨습니다. 여종의 인권과 삶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섬세한 마음이 담겨있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종의 제도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제도를 모든 문화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최대한 금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시는 법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후에 많은 지도자들이 바로 성경의 윤리관에 힘입어 노예제도를 철폐했습니다.
영원한 종이 되는 기쁨
사랑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종이 되는 길도 있었습니다. 아주 독특한 법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허심탄회하게 ‘내가 내 주인과 내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하니 나가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 그 주인은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 가야 할 것이다. 또한 문이나 문기둥으로 데리고 가서 그 귀를 송곳으로 뚫어라. 그러면 그는 영원히 그 주인을 섬기게 될 것이다”(5~6절).
아주 특이한 제도입니다. 법적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는데도 그 주인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주인집에서 얻은 처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평생 종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영원히’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냥 평생이라고 해도 되는데 ‘영원히’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미래에 있을 예언적 사건을 보여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귀를 송곳으로 뚫는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있을까요. 이를 고증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영원한 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대가가 피 흘려 찢겨 죽임 당해야 하는 고통임을 알고도 스스로 종이 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채찍에 맞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허리를 찔리는 고통을 겪으면서 종이 되셨습니다. 귀 뚫은 종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스스로 죄악 된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선택한대로 살도록 허용하십니다.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부담스럽고,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굴욕스럽게 느껴져서 자유인으로 살겠다고 선택한다 해도 어쩌면 허용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놀라운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족쇄라면 갑절의 족쇄를 채워주십시오. 만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멍에라면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멍에로 묶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멍에로 묶어지는 것이 유일하며 완전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자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귀를 뚫은 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기에 스스로 사랑의 종이 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귀 뚫은 종으로 헌신하면 좋겠습니다. 순종의 보석을 달수 있는, 거룩의 보석을 달수 있는, 기쁨의 보석을 달수 있는 귀 뚫은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순종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스스로 자원함으로 종이 되는 것이 귀 뚫은 종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매여, 종이 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우리의 영광이요, 즐거움입니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