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이재훈 목사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클라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두 가지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으로 부르심입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내게로 나아올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개인을 부르신 고유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 속에서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쓰임 받느냐는 각기 다릅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덩달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고유한 소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부르심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헌신조차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고려하지 않는 두 가지 조건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의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습니다. 거절해도 된다면 그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는 부르심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잡아당기시는데 버틸 수 있다면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버틸 수 있는 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불순종하면 순종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고려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일을 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그 일을 할 의사가 없거나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을 할 자격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부적절해 보이는 사람들이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일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창대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했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잘 낳는 아내를 둔 남자를 골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논리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획과 정반대되는 조건을 갖춘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보호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그는 포도를 짜는 틀에 숨어 밀을 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을 ‘큰 용사여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용사가 아닙니다. 아주 소심한 겁쟁이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큰 용사로 사용하셨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를 구원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를 가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멸망한다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룻길만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언덕에 올라가서 니느웨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기간 동안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다니엘을 변화시킨 것도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기록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기록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살인자요, 핍박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할 마음이 뚜렷하지 않거나 그 일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능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의 선택을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뜻과 의사를 뛰어넘습니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다섯 번이나 질문한 이유
“너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그것들은 아는 게 없고 재갈과 굴레로 제어하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 않는다”(시 32:9).
우리는 고집 센 말이나 노새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겠다고 말하면서 진짜 부르시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인도자요, 구원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다섯 번이나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려놓고 싶다고 내려놓을 수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잘 내려놓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잘 내려놓는 훈련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과 헌신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입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통해서 부르심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큰 나머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위험합니다. 우리의 소원인지 하나님의 부르심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너는 가거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로 보내 너로 하여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할 것이다”(출 3:10).
모세는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질문하면서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의 질문은 회피성 혹은 도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섯 번이나 이어진 모세의 질문에 성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권위주의적으로 몰아 부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때로 질문을 하고, 도망가려고 하고, 회피해도 하나님은 적절한 이유를 설명해주시면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도하시는 자상한 분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해답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제가 도대체 누구라고 바로에게 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다는 말씀이십니까?’하고 말했습니다”(출3:11).
이 질문은 자기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파헤쳐 봐도 깨닫지 못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내가 세운 계획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 부르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해야만 인생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세의 질문은 유익한 질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우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동상이 진짜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 같은 변신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동상 같은 존재가 살아있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생기가 불어넣어진 인생이 변화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생입니다.
모세는 40세 때 혈기로 살인을 하고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80세까지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처음 40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봤을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그는 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들었고, 바로를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낙심하고, 비교하고, 포기합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로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하나님께서 ‘내가 분명히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네가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고 나면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인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적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2).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해답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아무리 파헤쳐 봐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나를 창조하고, 부르시고,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가르쳐주십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내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할 때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출 3:13).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상하게 대답해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성경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번역됩니다. 성경에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파’, ‘여호와 살롬’ 등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고치시고, 필요에 따라 일하실 때 붙이신 이름입니다. 그 모든 이름을 합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설명할 때 명사로 설명하지 않고 동사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입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지혜가 되십니다.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되십니다. 화평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화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면 무엇이든지 응답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탐구하고, 책으로 읽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합니다.
약하고 무능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만약 저를 믿지 않거나 제 말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출 4:1).
모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염려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염려와 불신은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 중에서 80%는 실제 일어나지도 않는 일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자기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질문한 것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때 히브리 사람들이 싸우고 있을 때 중재자가 되려고 했는데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았느냐?’면서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인지 모세는 백성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 가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었고,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 꺼냈더니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은 표적들을 통해 모세에게 확신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래도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일강 물을 퍼부으면 그것이 피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표적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호와여,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후에도 그렇습니다. 저는 말이 어눌하고 혀도 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입을 준 자가 누구냐? 또 귀머거리나 벙어리가 되게 하거나 눈으로 보게 하거나 눈멀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거라. 네 입에 있어 무슨 말을 할지 내가 가르쳐 줄 것이다’“(10~12절).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가 되어 줄 것이고,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이 되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편지를 많이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해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말을 잘 하는 설교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료를 통틀어 보면 사도바울은 말이 어눌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미국 대각성 운동의 요나단 에드워드도 스피치 능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스턴에 있는 한 교회에서는 원고를 들고 읽는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말을 잘 하고 못하고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초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약하고 무능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위대한 하나님으로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그 일을 할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출 4:13절).
드디어 모세가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할 수 있는 것을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회피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겠다고 하지만 진짜 부르시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도망가기도합니다. 모세의 다섯 번의 질문은 불신과 두려움을 겸손으로 치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로 나가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불순종입니다. 어떤 사람을 불렀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불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보낼만한 사람입니다. 네 번의 질문에는 자상하게 대답하신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모세가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가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가 너를 보게 되면 기뻐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말해 그의 입에 말을 넣어 주어라. 내가 네 입과 함께할 것이며 그의 입에도 함께해 너희가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출 4:14~15).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던 모세가 아론과 함께 해 주겠다고 하니 순종합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이는 사람의 도움은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출4:20).
그 지팡이는 새롭게 받은 지팡이가 아닙니다. 모세가 양을 치던 지팡이였습니다. 평범한 막대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통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던 것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나한테 있을 때는 평범한 지팡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위대한 지팡이가 됩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는 모세를 부르셔서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더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더 위대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거절하고 싶거나 회피하고 싶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지속됩니다. 죽음 넘어서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뤄지지 않으면 후대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