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무신론자 리차드 도킨스는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허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불쾌한 인물이다. 공공연하게 질투하고, 옹졸하고, 부당하고, 용서를 모르는 권위적인 인물인데다가 복수심이 강하고, 피에 굶주린 종족 말살자이며, 여자와 동성애자를 혐오하며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영아를 살해하고, 심지어 자식까지도 살해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혹평했습니다. 이러한 허무맹랑한 주장을 담은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사탄이 세상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람이 구약성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세심하게 읽었다면 결코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전체적으로, 문맥에 따라, 그 상황을 따라 읽었다면 절대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어느 한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한다고 받아들이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말시온’이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과 정의만 강조하는 냉혹한 신이고,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비와 구원을 베푸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신약만 인정하고, 구약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별했습니다. 말시온의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리차드 도킨스의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말시온과 도킨스가 알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구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구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사탄을 대항할 때도 신명기를 인용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도 시편을 암송하시고, 인용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잘못 가르친 것을 교정하면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시는 내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을 끊임없이 인용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구약의 가르침을 올바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의 완성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등식으로 매우 무식하고 천박한 사고에 불과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도킨스의 주장과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노하실 때는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실 때도 공의로운 진노보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과 인자를 더 많이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참지 않으시는 것보다 참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노하신 경우보다 노하시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가끔 화를 내면 맨날 화낸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모가 화 낸 경우보다 화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녀가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다 알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벌하시는 것보다 벌하지 않고 봐주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분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진노, 분노는 ‘아브’입니다. 문자적으로 코를 뜻합니다. 왜 코일까요. 아마 진노하면 가장 먼저 코가 빨개지는 현상이 나타나서 그럴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문장은 문자적으로 코가 길다는 문장으로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코가 긴 분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단골메뉴는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가혹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면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빠져 나오자마자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여호와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죽게 할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 군대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춤을 추고 노래했지만, 곧이어 광야에 들어가자마자 물이 쓰다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단물로 바꿔주시고 자상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이 남동쪽으로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또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원망하게 된 세 가지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에서 고기 삶는 솥 주위에 둘러앉아 먹고 싶은 만큼 빵을 먹을 때 여호와의 손에 죽는 게 나았을 텐데 당신들이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 이 온 회중이 다 굶어 죽게 생겼지 않습니까!’”(3절).
그들의 원망에 나타난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바로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 이집트에서 고기 삶는 솥 주위에 둘러앉아 먹고 싶은 만큼 빵을 먹을 때를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억력은 정확하지 못합니다. 이집트에서 고기 삶는 솥 주변에 둘러앉았을 때만 기억하지 말고 벽돌을 굽던 때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일을 기억했다면 얼마나 감사가 넘칠까요.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을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기억력을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그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때 원망이 일어납니다. 진짜 중요한 것과 비교해야 합니다.
둘째,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욕심을 채우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현실에서의 필요가 채워진다면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욕심과 필요를 구별할 줄 알아야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욕심인지 필요인지를 통찰력 있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원망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과장되게 상상합니다.
3절에서 보면 그들은 ‘다 굶어 죽게 생겼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양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맞지만 17장 3절을 보면 물이 없어서 우리와 가축들이 목마르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가축들이 있었습니다. 양식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굶어 죽을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분명 정확하지 않았고, 비현실적이었고, 과장된 것이었습니다. 과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해야 될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고, 미래에 대해 과장되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분명히 죄입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불러 일으킬만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려고…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에서 비같이 먹을 것을 내려 주도록 하겠다. 그러면 백성들이 날마다 밖에 나가 그날 먹을 만큼을 거둘 것이다. 내가 백성들을 시험해 그들이 내 율법을 지키는지 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여섯째 날에 거두는 것은 다른 날보다 두 배를 거두어야 한다’”(4~5절).
하나님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너희를 위해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의 책망이나 진노의 말씀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원망을 이해하셨습니다.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을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분께 원망하는 것을 그분이 들으셨다”(7절).
8절에서도 모세가 “너희가 그분께 원망하는 소리를 그분께서 들으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9절에서도 “여호와께 나오라 너희가 원망하는 소리를 그분께서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들었다.”
들었다는 말은 단순히 귀로 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듣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원망을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원망을 그냥 들어주셨을까요. 그것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원망을 들으셨다는 말씀 다음으로 많이 반복되는 말씀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신 것은 그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장차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기 전과 후
민수기 11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것을 가지고 불평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의 시점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설하고 이제 막 행진할 때입니다. 출애굽한지 2년 즈음 되었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점은 출애굽한 지 두 달 15일째 되었던 시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흐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23장까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시내산 이전에는 하나님이 참고 받아주셨습니다. 원망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는 엄격해지셨습니다. 똑같은 불평이라도 시내산 율법을 받기 전과 후가 다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율법대로 살겠다는 헌신과 결단을 한 이후부터는 율법에 근거해서 벌하겠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벌이 주어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시점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도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문도 모르고 출애굽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문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거듭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치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출애굽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은혜와 사랑으로 건져주셨습니다. 그런데 건짐을 받고 보니 광야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원망을 다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기도응답이 빠른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은 지가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기도응답이 더뎌 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시간대로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그 사람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많은 긍휼과 사랑이 베풀어져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도 받아줘야 하는 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 된 이후에는 보다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빵으로만 사는 것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하나님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마치 오병이어 기적처럼 베풀어주셨습니다. 철새인 메추라기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에서 다시 북아시아로 올라갈 때 너무나 지쳐서 사람들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광야에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으로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만나는 건조한 사막지방에서 서식하는 일종의 곤충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물질이 굳어질 때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백성들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오병이어 기적처럼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들을 먹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심으로 그들을 교육시켰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세 가지 원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첫 째, 날마다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노동의 영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한 번의 기적으로 인해 게을러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기적의 위험은 노동의 가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거두는 노동을 통해서 기적의 위험을 피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절제의 영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각자 필요한 양을 계산해 주셨습니다. ‘한 오멜’만큼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오멜이라는 것이 당시의 단위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단위로 달아보니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욕심이 나서 한 오멜보다 더 많은 것을 거뒀더니 아침에 다 썩어 구더기가 나고 냄새가 났습니다. 더 많이 거둬가도 소용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꼭 먹을 만큼만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키며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영성을 가르치셨습니다. 6일 동안 매일매일 거두다가 6일째에는 이틀 치를 거두도록 하셨는데 그 다음날에도 썩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적의 과정을 통해서 날마다 거두도록 하시고, 필요한 만큼만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며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근거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너희를 낮추시고 배고프게 하셔서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만나로 먹이신 것은 너희로 겸손하게 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신 8:3).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가르쳐주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은 경제문제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계십니까. 그 원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듯이 날마다 필요한 만큼 거두게 하시고 끊임없이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통해 교육하시는 또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양식인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 죽었다. 그러나 여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 있는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다”(요 6:18~51).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였듯이 예수님도 광야에서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구약의 만나와 예수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구약의 만나는 사람들이 먹고 죽었지만,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합니까. 죽음을 전제로 깨닫지 않는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생이 있어야만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하늘의 양식입니다. 오늘도 하늘의 생명이요, 양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계십니까.
그 원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