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_십계명(출 20장 1~17절)/이재훈 목사
“십계명은 우리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명령이 아닙니다.
더 풍성하고, 더 기쁘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계명입니다.”
인간사회에 법이 필요한 이유는 양심의 기능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양심의 기능이 있다면 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연법입니다. 양심이 죄로 말미암아 훼손되고 무너졌기 때문에 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법이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제도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땅의 죄악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법이 죄를 막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법이 정교하다고 할지라도 양심이 회복되지 않으면 그 법을 빠져 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법이 있어도 죄는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목적은 양심의 기능을 회복하고,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양심의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크신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때 양심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법조문을 들이대시면서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무섭게 명령해도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양심의 능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양심을 회복시키고, 법을 지키게 함으로써 질서를 회복시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다”(2절).
법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만드신 분이 누구시고, 그 법이 어떠한 상황에서 주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십계명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고통 받던 민족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이 자유케 된 민족에게 주신 법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진리를 나타내셨습니다.
십계명은 모든 하나님의 요약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누가 주셨는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주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십계명 앞에서 자부심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십계명 앞에서 양심이 깨어나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식법입니다. 제사법을 포함한 의식법입니다. 두 번째는 재판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공동체가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 필요한 법입니다. 세 번째는 도덕법입니다.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도 폐지되고, 그 외의 모든 민족들에게도 폐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준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취가 이뤄졌기 때문에 미리 보여주는 예표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재판법은 그 시대의 문화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바로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법들이 있습니다.
도덕법은 유대인에게나 그 밖의 모든 민족에게나 당시 시대나 지금 시대나 여전히 유효한 법입니다. 십계명은 이 도덕법의 핵심입니다. 십계명은 모세시대에 주어졌더라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존재하고 지켜야 되는 법입니다.
십계명은 모든 하나님의 요약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계명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은 십계명을 설명하는 것이고, 많은 사건들은 십계명의 역사적 예화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십계명은 무엇인가를 하라는 명령보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부정명령이 주어졌을 때는 정반대로 해야 하는 명령까지도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면 정반대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긍정명령으로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 마음상태까지 포함하는 명령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해석 방법을 적용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했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해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살인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고, 분노하고, 살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살인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셋째, 십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였을 경우에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 우선입니다. 예를 들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내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지만 부모님을 신으로 모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
첫 번째 계명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어떤 신도 없게 하여라”(3절).
이 계명을 긍정으로 바꾸면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신 6:5). 이 계명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타락한 인간에게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한낱 가치 없는 것을 전심으로 추구한다면 인생을 얼마나 평가절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추구하면 우리 인생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두 번째 계명입니다. “너는 너 자신을 위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이나 무슨 형태로든 우상을 만들지 마라.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예배하지 마라. 네 하나님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니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에게 갚되 3, 4대까지 갚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1000대까지 사랑을 베푼다”(4~6절).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에서 확대되었습니다. 십계명은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루터교회에서는 6절까지를 첫째 계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카톨릭에서도 그렇습니다. 루터교회와 카톨릭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합쳐서 보는데 기독교는 구분해서 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의 위험은 어디에서 옵니까. 우상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약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섬기는 것보다는 보이는 어떤 것을 신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신을 보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오자 백성들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수많은 동물로 형상을 만들어 신이라고 했습니다. 금송아지 신, 고양이 신 등 수없이 많은 신들을 만들어놓고 섬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충동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육신이 있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어떤 동물이나 이미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우상숭배를 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섬기기보다 조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을 원합니다.
우상과 관련해서 자녀들에게까지 심판이 임한다는 엄한 경고가 따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상을 한번 만들어놓으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우상이 많은 민족들을 보면 집에도 우상이 있고, 마을에도 우상이 있는데 바꾸지 못합니다. 수대에 걸쳐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면 조상들이 화낸다고 생각합니다. 우상이 만들어지면 대대로 자손에게까지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위험은 우상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갑니다.
여호와의 이름과 안식일
세 번째 계명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 마라. 여호와는 그 이름을 헛되게 받고 함부로 들먹이는 자들을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7절).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아도나이’라는 다른 발음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성경을 필사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기도하고, 때로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이름을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몇 자 적고 나와서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다시 쓰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만 주문처럼 부르면 마술지팡이처럼 원하는 대로 무조건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면서 불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극단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 그 이름에 담긴 능력을 날마다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너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6일 동안은 네가 수고하며 네 일을 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니 너나 네 아들딸이나 네 남녀 종들이나 네 가축들이나 네 문안에 있는 나그네나 할 것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마라. 여호와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안식일에 복을 주고 거룩하게 했다” (8~11절).
하나님은 6일간의 일과 하루의 쉼이라는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원리를 계명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의 원리를 인간들에게 넣어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보호하는 법칙을 함께 만드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다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창 2:2~3).
언뜻 보면 6일 동안 천지창조를 마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일곱 째 날에 마치셨습니다. 일곱 째 날에 쉬시므로 일곱째 날에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안식함으로 안식까지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이 무엇입니까. 창조의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안식은 창조에 있어서는 마지막이지만 하나님의 의도에 있어서는 가장 첫 번째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거룩하게 하신 것은 시간입니다. 공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공간속에 살면서 시간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날마다 구별된 시간을 가지면 시간 가는 줄 알게 됩니다.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공간보다 시간에 가깝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공간속에 계시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구별된 시간이 없이는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은 공간을 떠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란 공간중심의 삶에서 시간중심의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통해서 공간중심에서 시간중심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그 공간속에 파묻히도록 하나님이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 간음하지 말라”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오래 살 것이다”(12절).
여러분, 신체 중에서 우리의 존재를 가장 설명해주는 기관이 있다면 배꼽입니다. 배꼽은 나는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배꼽으로 연결된 부모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실 때 배꼽 없는 존재가 아니라 배꼽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배꼽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부모님을 통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또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자신의 미래를 축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한 어머니가 다섯 자녀는 키우는데, 다섯 자녀가 한 어머니를 못 모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살인하지 마라”(13절).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으로 살인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살인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까지 연결시키셨습니다. 이것을 긍정으로 바꾸면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있는데 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간음하지 마라”(14절).
우리 시대는 일곱 번째 계명을 가장 무시하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법원에서 간통죄가 형사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결정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간음은 단지 배우자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한 죄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더 확대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을 지라도 마음의 간음한 것도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이 계명을 적극적으로 바꾼다면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삶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몸이 죄악의 도구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욕망보다 더 큰 것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가장 비밀스런 생각과 마음의 욕구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도둑질과 위증, 네 이웃 것을 탐내지말라”
여덟 번째 계명입니다. “도둑질하지 마라”(15절).
아마 두 사람 이상 살고 있는 한 이 계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공권력과 예산이 이 계명이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 계명 하나만 지킨다면 수많은 예산이 낭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농경사회보다 현대사회에 더 필요한 계명입니다. 과거 농경사회에는 훔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고 훔치는 방법도 간단했습니다. 다 물건들이었습니다. 정말 배고파서 도둑질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정말 배고파서 도둑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배부른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도둑질하는 시대입니다. 이 계명을 긍정문으로 바꾸면 더 많은 해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도둑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불의하게 내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과 정반대로 행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갖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헐벗은 사람이 옷이 필요하면 입혀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입혀주지 않았다면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 계명입니다. “네 이웃에 대해 위증하지 마라”(16절).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어기는 계명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어깁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기인 혀를 통해서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진실을 왜곡하면서 이 계명을 어깁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널리 전파하는 것을 통해서도 아홉 번째 계명을 끊임없이 어깁니다. 우리는 아홉 번째 계명을 한번 씩은 가볍게 어기면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실이 아니면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열 번째 계명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어떤 것이라도 네 이웃의 것은 탐내지 마라”17절).
열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계명입니다. 탐심을 품었는지를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밀스런 죄입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인식하기 어려운 죄입니다. 탐심은 다른 죄를 만들어내는 근원이 됩니다. 탐심은 우리 눈을 어둡게 하고, 근시안적으로 만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십계명은 우리의 삶을 제한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들을 누가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출애굽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내린 명령은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명령이 아닙니다. 더 풍성하고, 더 기쁘고, 즐거운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