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준 목사의 Talk Talk 열왕기 14
‘하늘의 창’이 된 나병 환자들
지난주 살펴 본 나아만 장군은 나병 환자였다. 열왕기하에는 또 다른 나병 환자들이 등장한다. 6~7장을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한다. 오랫동안 계속된 포위 작전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죽게 됐다. 어미가 어린 자식을 삶아 먹는 끔찍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기가막한 현실을 들은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탓하며 그를 저주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이 비극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때 엘리사의 예언을 들은 왕의 신임을 받는 한 장관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다 한들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믿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이라 한들 이런 비참한 기근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는 불신과 적대감의 표현이다.
여기서 장관이 사용한 ‘하늘의 창’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두 차례 더 쓰인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 때 ‘하늘의 창’을 열어 엄청난 양의 비를 땅에 쏟아 부으셔서 심판하셨다(창 7:11). 또 말라기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주실 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고에 십일조 전체를 가져다 놓고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라. 이 일로 나를 시험해 내가 ‘하늘 창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자리가 없도록 복을 쏟아 붓지 않나 보라”(말 3:10). 왕의 신하는 ‘하늘 창’을 여시고 때로는 심판을, 때로는 축복을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이에 엘리사가 이렇게 응수한다. “네가 네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 못할 것이다”(왕하 7:2).
엘리사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단 하루만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사마리아의 기근을 해결하셨나? 마치 애니메이션에서처럼 하나님이 하늘의 창을 여시고 음식을 투하해 주셨나? 아니면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나? 아니었다.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네 사람을 당신의 ‘하늘의 창’으로 사용하셨다. 성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있었다. 이들도 배고파 죽을 지경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굶어죽으나 아람 군대에 가서 칼에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니 혹 항복하면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고 먹을 것을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간다.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셨다.
아람 군대는 나병 환자 네 사람(히브리어 ‘메쪼라임’)이 오는 소리를 마치 이스라엘과 헷과 이집트 연합군대(히브리어 ‘미쯔라임’)가 오는 소리로 착각했다. 마치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칠 때 나팔소리와 항아리를 부수는 소리, 함성을 통해 적들을 정신없게 만들어 자중지란에 빠져 자멸하도록 만든 것과 유사하다. 나병 환자 네 사람이 가보니 이미 아람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다 떠나고, 그들이 머물던 진영에는 음식과 은과 금과 의복들이 널려 있었다. 이들은 마치 대승을 거둔 군인처럼 전리품을 취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끼리 독차지하지 않는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자기들은 나병 환자였기 때문에 성 밖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외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당한 이들은 자신들을 외면했던 저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성문지기에게 전하고, 결국 성 안에 있던 자들이 다 나와 일거에 배고픔을 해결한다. 하나님은 천시받는 나병 환자들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셨다.
누가복음 17장에는 10명의 나병 환자들이 치유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은 이 가운데 단 한 사람을 주목한다. 그는 ‘사마리아 나병 환자’였다. 그는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니 예수님을 찾아와 그 분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누가복음에서 ‘~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는 치유와 회복을 보는 축복을 누린 사람은 다름아닌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자 모든 사람들이 거부한 ‘나병 환자’였다.
네 명의 나병 환자들과 달리 엘리사의 예언을 믿지 못한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다. 엘리사의 말대로 이뤄진 것이다. 장관에게는 믿음의 눈이 없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늘의 창을 여시고 넘치도록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보란 듯이 그 장관에게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셨다. 단 하루만에 기근이 풍성함으로 바뀌는 현장을 보았다. 그러나 축복의 현실을 바로 눈앞에서 봤지만 참여하진 못했다. 불신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는 엘리사의 기도가 필요하다. 엘리사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아람 군대를 보며 두려워했던 그의 사환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 각박하고 메마른 현실을 넘어 오늘도 하늘의 창을 여시고 우리를 만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봐야한다. 아무것도 없는 감옥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공급해주심을 믿었던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 글은 박철현, ‘하늘의 창: 두 차원의 세계, 두 개의 시각’, <하우주석 열왕기하>를 참조함.
/최원준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