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나는 이렇게 예수바보행전을 쓰겠다

1. 목회자
2. 선교사
3. 성도

 

“나는 과연 예수바보가 될 수 있을까”

 

‘예수바보행전’ 이 여섯 글자가 온누리교회 비전으로 선포되던 날, 나는 한국 교회의 밝은 미래를 어렴풋하게 볼 수 있었다. 한국 교회가 물량주의, 승리주의, 세속화 등으로 침몰해가고 있다고 교계 안팎에서 비난하고 있는 때에 복음에 충실한 교회의 회복을 알리는 힘찬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 온누리교회는 새로운 비전을 이루어가고 있다. 그간 한국 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온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사회선교’가 선포되었고, 전통적인 영혼 구원의 복음을 고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온 세상에서 지금도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기치가 올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그 어느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예수바보행전’이 교회 비전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지난 4일 교회창립주일 설교와 부흥비전집회 말씀, 울어라 한반도여 집회 등을 통해 예수바보행전의 의미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위한 바보’, ‘예수를 바로 보여주는 교회’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동의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과연 나는 어떻게 예수를 위한 바보가 될 수 있을까?’라는 실천적 고민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바보행전을 써 내려가라는 준엄한 주님의 명령 앞에서 여전히 바보보다는 똑똑한 자로, 낮아지기보다는 더 높아지려는 바벨탑의 후예로, 연약해지기보다는 더 강력한 힘을 움켜쥐고 싶은 자로 남고 싶은 욕망에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변변치 못한 목사의 고민을 한번 들어 보시겠는가?

 

나는 ‘지극히 큰 사도’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고린도후서 11:1~12:10은 바울의 ‘바보 설교’라고 불린다. 바울이 자신을 비방하는 적들에 대해 자신을 옹호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 대해 자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 자체가 바울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부득불 말한 것은 자기 자랑이었다. 당시 바울이 사도일 수 없다며 비방하고 나선 바울의 적대자들은 모름지기 사도라면 혈통과 배경(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 좋아야 한다고 자랑하였다. 또 그들은 사도라면 이적을 행하고 환상을 본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내세웠다. 그래야 ‘지극히 큰 사도’(super-apostle)라 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자신들은 바로 이 지극히 큰 사도가 보낸 사도(사도란 본래 보내심을 받은 자, 대리자란 뜻)임을 과시했고, 이것을 입증하는 지극히 큰 사도가 써 준 추천서를 우쭐대며 보여주었던 것 같다.
여기에 맞서 바울은 참다 참다 어쩔 수 없이 자랑한다. 그가 이적을 행하고 환상을 보았음을 말이다. 바울은 비록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하지만 또한 자신이 지극히 큰 사도와 비교해 꿀릴 것이 전혀 없다고 자랑한다(고후 11:5, 12:11). 바울은 많은 이적을 행하고 환상과 계시도 수차례 보고 들었다. 바울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지극히 큰 사도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바울의 위대함은 그것을 자랑질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목회자가 이적을 행하고, 환상과 계시를 보는 일은 목회에 큰 도움이 된다. 성도들은 설교 잘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목회자를 원한다. 그러나 또한 ‘영험한’ 목회자를 기대한다. 이때 영험이란 신비스러운 체험이나 능력 행사다. 나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병자가 치유된다면 목회가 얼마나 수월할 것인가. 성도가 상담하러 왔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 확실한 권면을 해줄 수 있다면 성도가 자발적으로 나를 우러러 볼 것이다. 여기에 좋은 시설만 갖춰진다면 교회 성장은 명약관화다. 그래서 나에게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불순한 사모함이 있다. 그 성령의 능력을 이용해 교회를 성장시켜 지극히 큰 사도로 대접받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있다.
이 시대에 바로 이 같은 지극히 큰 사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신(新)사도 운동’을 말하는 자들이다. 신사도 운동이 교회성장학으로 잘 알려진 풀러신학교의 피터 와그너에게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존 윔버를 초청해 ‘표적과 기사와 교회성장’이란 과목을 개설한 것이 신사도 운동의 시작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신사도 운동을 포함한 이 시대 변질된 성령 운동의 이유에 대해 박영돈 교수는 “옛사람의 부패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성령의 깊은 사역을 먼저 추구하지 않은 채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으려하기 때문에 광명의 천사로 위장된 악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222). 주님의 우선적 관심은 목회나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아니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한 목회자와 사역자들 탓이 크다. 그런데 겉으론 이들을 비난하면서도 나 역시 그들과 다를바 없는 감춰진 욕망이 있으니 아, 어찌할 것인가! “성령의 사람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보다 한 분의 평가와 인정이 훨씬 더 중요”(박영돈, p238)하다고 나 역시 설교하지만, 지극히 큰 사도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있다. 과연 나는 예수바보가 될 수 있을까?

 

21세기 우신예찬

 

15~16세기 네덜란드 인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Moriae Encomium, 어리석은 신을 찬양한다는 뜻)에서 ‘모리아’(헬라어로 ‘바보’라는 뜻)라는 여신을 등장시켜 당시 타락한 중세교회와 사회를 풍자한바 있고, 이는 종교개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그가 해학적으로 비판했던 바, 재물과 권력에 몰두하고 목양에 뒷전인 채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던 당시 성직자들의 모습이 오늘날에는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나타나고 있고, 오히려 가톨릭은 프란체스코 교황의 겸손과 청빈, 과감한 교회 개혁 실천과 사회개혁 요청으로 인해 그 인기가 높다(물론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이 없다는 게 아니다. 또 충직한 개신교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작금의 상황을 보건대 이제 21세기판 <우신예찬>을 써야할 것 같다. 어리석음의 여신 모리아는 ‘기독교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언급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나 힘 있는 자들, 부자를 가까이하기보다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많은 동물 중에 가장 어리석은 나귀새끼를 타셨으며,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실 때도 하늘의 왕 독수리가 아니라 비둘기 형체로 임하셨으며,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양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자신을 ‘어린 양’이라고 부르게 하셨다. 에라스무스는 결국 기독교는 어리석음과 연약함의 종교임을 말한 것이다.(강영안, ‘에라스무스’, <철학과 현실> 101, p176 참조).
목회자에게도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자인 성도들을 더 챙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 분들이 나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볼품없게 나귀새끼를 타셨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했을 때 소형차를 탔지만, 목사 안수 20년을 바라보는 나는 기사가 운전해주는 폼 나는 차를 타고 싶은 욕망이 가끔 드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로 지금 내 차는 경차다. 예수님은 자신을 ‘어린 양’이라 부르셨지만, 나는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아슬란’이 더 멋져 보인다(물론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 예수는 유대지파의 사자로 나온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욕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진정한 ‘모리아’는 ‘모리아 산’에서 이뤄진다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얻은 자식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은 모리아 땅의 어느 산이다. 우리는 통산 ‘모리아 산’이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모리아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헬라어 ‘모리아’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엉뚱한 묵상을 해본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할 만큼 어리석었다. 정말 우직(愚直)한 사람, 즉 바보처럼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 우직함에 감동하셨다. 그래서 모리아 산에 성전을 세우셨고(대하 3:1), 일부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 산에서 예수님의 피가 흘러내렸다.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인 바보 같은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드린 우직한 하나님의 아들, 이 두 분의 뜻을 섬긴 또 다른 바보 성령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이야기를 ‘아케다’라고 부른다. 결박하다란 뜻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결박한 이야기란 말이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결박하고, 내 욕망을 결박하는 아케다 이야기가 예수바보행전의 내용이 아닐까?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결박하는 모리아(바보)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 예수바보행전을 써나가는 자들이 아닐까? 그래서 난 내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심정으로 이 노래를 불러본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려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최원준 목사(강동 온누리교회)

최원준 목사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