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그때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왜 우리가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그때는 이렇게 대답하세요.
 
“왜 우리가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한국 교회는 요나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으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안타까워하며 그 영혼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향해 보여주신 사랑이 죽음과 같이 강한 것이라면 우리도 그러한 사랑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사랑을 닮기 위해 그들을 품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정말 체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동경 러브소나타가 한창 준비되고 있었을 때였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일본 선교에 집중하시는 모습을 보고 질문했다. “목사님! 정말 일본 선교를 하시려나보네요.” 그때 하용조 목사님께서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 줄 알아?”” 
지난 9월 22일 온누리신문에 실린 김철희 목사의 기고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그 장면이 생생하게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아가서 말씀이 떠올랐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하고 질투는 무덤만큼이나 잔인해 불꽃처럼 거세게 타오릅니다”(아 8:6).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신다니 정말 나를 사랑하시려나보네요”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 줄 알아?” 
인간은 모두 사랑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사랑에 상처를 많이 받아왔기 때문이다. 사랑에 상처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한 사랑이라는 증거이다.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주고받았지만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른 것이라고 여겨지면 그것을 배신과 무관심으로, 때로는 손해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에 대해서도 불완전한 것이라고 반응할 때가 있다. 우리는 신앙의 모습에 따라 예수님의 사랑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신앙의 모습이 올바르고 뜨거울 때는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다가도 그렇지 못할 때는 뒤로 한 발 물러선다. 바르지 못한 나의 모습에 예수님이 벌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사랑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다. 실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대속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셨다. 예수님은 그 피로 한국을 사랑하신 것 같이 일본도 사랑하셨다. 일본은 1549년 프란시스 사비에르에 의해 천주교가 들어와 한 때 부흥했지만 금교령 이후 오랜 기간 박해의 역사를 보내왔다. 우리는 그 시기에 수십만명의 순교자의 피가 그 땅에 흘려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 매년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발로 밟아야 했고, 불상의 뒷면에 십자가를 몰래 새기고 합장하듯이 기도해야 했다. 250년 이상을 숨어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을 ‘카쿠레 기리시단’이라고 한다. 그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1873년 일본에서 기독교가 허용되었지만 그 시기 군국주의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 한 때 부흥의 시기가 있기도 했지만 일본의 기독교는 지금도 국민의 0.4%정도만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한국 교회는 요나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으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그 영혼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향해 보여주신 사랑이 죽음과 같이 강한 것이라면 우리도 그러한 사랑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해야 한다.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어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예수님의 사랑을 닮기 위해 그들을 품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정말 체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 이영선 목사(오사카 온누리교회)

작성자  홍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