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무리요의 ‘베데스다 연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board image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가 그린 ‘베데스다 연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1667년, 런던국립미술관 소장).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으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는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셨다. 성육신한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애(public life) 기간 구약에서 약속한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몸소 보여주셨다. 인류를 향한 긍휼함으로 몸과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주시는 치유의 기적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8:17).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예수님은 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4~15). 
혈루증을 앓는 여인도 고쳐주셨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에서 살며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렇게만 해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성경에는 이러한 치유의 기적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런데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유시켜주는데, 왜 다른 경우에는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시는 것일까? 예컨대 가버나움에서 만난 두 소경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 하시기 무섭게 눈을 뜬다. 반면 예루살렘에서 만난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자는 바로 고쳐주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땅에 침을 뱉어 그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고 말씀하신다. 연못에 가서 눈을 씻은 소경은 마침내 앞을 보게 된다(요 9:5~7). 
가버나움에서 믿음 있는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매달아 내려준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셨던 예수님은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또 다른 중풍병자를 만나신다. 오늘 묵상할 성경본문은 요한복음 5장 1~9절 말씀이다. 이 환자를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고쳐주실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 등 환자들이 즐비했다. 주의 천사가 가끔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을 때 맨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38년 동안이나 중풍을 앓고 있던 환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연못가에 오래 누워있었다는 것도, 그가 오랫동안 중풍을 앓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다. 이 중풍병자를 향한 예수님의 첫 물음은 이러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환자가 대답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늘 다른 사람이 먼저 물속에 들어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그는 즉시 나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오늘 성경본문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스페인의 라파엘로’라고 불리는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년)가 그린 ‘베데스다 연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이다. 비록 베데스다 연못가의 풍경은 17세기 스페인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연못가에서 중풍병자를 만난 예수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보시고 즉각 그의 육체적 질고(疾故) 이면에 심리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셨다. 수십 년 동안의 질병은 그를 육체적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능력에 대한 불신과 자괴감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당당히 삶을 살아갈 독립의지를 상실한 채 의타심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핑계만 대는 온전하지 못한 삶, 파편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병자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이빨이 나간 물병과 밥그릇은 그의 파편적인 삶을 상징한다. 
그림을 보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신다. 예수님의 한없이 자애롭고 온화한 표정은 이 중풍병자를 향한 아니 우리 인류를 향한 긍휼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제스처는 뜻밖에도 예수님의 긍휼과 간절함과는 거리가 있다. 예수님께서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고 매달려야 할 그의 양 손이 구구절절 변명을 하며 주춤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로 향하지 않고, 38년 동안이나 누워있던 침상에 머물러 있다. 그는 몸뿐 아니라 마음을 침상에 스스로 결박해 놓은 상태다. 
여기서 ‘침상’ 혹은 ‘자리’는 중풍병자의 육체적 질병과 심리적 의존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는 상처에 구애받고 있다. 아니 상처에 사로잡혀 있다.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 보인다. 겉으로는 병을 고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극히 자아중심적인(ego-centric) 그의 의식은 어느새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갈망에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아픈 상처와 상한 마음이 부끄럽다. 이를 사람들 앞에 또 예수님 앞에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내적 억압과 회피를 부추기는 강력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하릴없이 침상에 꽁꽁 묶어놓고 있다. 
중풍병자의 이런 마음 상태를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과연 이 병자가 자신의 육체적, 심리적 질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력한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경직되고 마비된 손발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굳어있다. 그는 계속 변명을 늘어놓는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시작은 이러한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선포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낫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 믿음, 순종
 
앞에서 말한 백부장의 하인이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예수님께서 다른 절차 없이 바로 고쳐주신 것은 백부장과 여인의 믿음을 이미 확인하셨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에서 만난 중풍병자 역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지붕까지 뚫고 환자를 예수님 발치에 내려놓은 4명의 친구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이었다. 
그림에서처럼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우리가 낫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 강한 믿음과 순종의 자세가 있을 때에야 예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개는 더럽고 추한 병자 주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늘 주인에게 복종하는 개의 순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가 무리요는 그 병자에게 아니 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 자신의 상처나 상한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의지와 의식적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뉘우치는 마음이 있는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 우리가 늘 부르는 복음성가처럼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눈물을 아신다. 주님은 우리가 기꺼이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상한 마음, 홀로 울던 마음을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은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너도 너 자신의 편이 되어라”고 늘 말씀하신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제발 피동적으로 누워만 있지 마라.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 걸어라!”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