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모세 목사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세계 역사’ 1
류모세 목사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세계 역사’
유대인과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오스만터키제국이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1453년) 동서를 잇는 교역 루트가 막히게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던 후추와 향료 중개무역으로 인한 모든 이득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고스란히 오스만터키제국의 차지가 되었다. 후추와 향료의 본 고장 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가장 먼저 나선 선두 주자가 포르투갈이었다. 유럽의 변방인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그늘에 가려 2류 국가 신세를 면할 수 없었는데 신항로를 발견하면서 잠시나마 1등 국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로 불리는 엔리케는 항해 관측소를 세워 신대륙으로 향하는 바닷길을 열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했다. 이 항해 관측소 소장인 유다 크레스케스는 당시 유명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크레스케스는 마요카섬의 지도제작자였는데, 유럽에서 지도와 나침반의 대가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있은 후에 포르투갈 궁중의 천문학자로 등용된 아브라함 자쿠토 역시 유대인이었다. 1495년 희망봉을 돌아서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탐험에 앞서서 최종적인 자문을 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쿠토였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스페인이 나섰다. 옆 나라 포르투갈의 독주를 시기와 질투 속에 지켜보던 스페인은 1492년이 되면서 국운이 융성해진다. 1492년은 여러 모로 스페인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이슬람 통치의 오랜 잔재를 뽑아낸 해이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한 해이다. 중세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스페인 유대인공동체가 추방된 해이기도 하다. 세 사건은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상관관계가 숨겨져 있다. 412년 게르만족의 분파인 서고트족과 함께 스페인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이후 1세기 반의 정치적 혼란기에 종교적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589년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리카르도가 국가적인 개종을 단행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의 개종’과 ‘해외추방’ 중에서 택해야 했다.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가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다시금 유대인 역사에 반전이 일어난다. 정복자인 이슬람교도와 함께 추방된 유대인들이 합류하면서 스페인은 이후 5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유대인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소왕국이 뒤섞여 유럽의 3류 국가에 머물던 스페인 역사의 새 장은 1469년 아라곤 왕(페르디난드)과 카스틸레 여왕(이사벨라)이 결혼하면서 열린다. 그들이 결혼하고 10년 뒤 독실한 기독교 제국인 스페인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 사가 입장에서 보면 머지않아 닥쳐올 엄청난 비극의 전조였다. 1492년 1월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왕국인 그라나다를 함락한 스페인은 그 여세를 몰아 8월 1일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고 만다. 유대인들이 추방된 항구에서 출항을 기다리며 정박 중인 세 척의 배가 있었는데 신대륙으로 향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신대륙 발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누구보다 유대인들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박 건조가 유대인들의 압류된 재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선단에는 숙련된 지도 판독자와 통역관, 의사들이 동행했는데 그들 대부분도 유대인들이었다. 콜럼버스는 인도인이 히브리어나 아랍어를 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유대인 통역관인 루이스를 데리고 간 것이다. 신대륙에서 옥수수를 가져와 기근으로 죽어가던 유럽인들을 살린 것도 유대인 루이스에게 돌려야 할 공적이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로 불리는 엔리케는 항해 관측소를 세워 신대륙으로 향하는 바닷길을 열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했다. 이 항해 관측소 소장인 유다 크레스케스는 당시 유명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크레스케스는 마요카섬의 지도제작자였는데, 유럽에서 지도와 나침반의 대가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있은 후에 포르투갈 궁중의 천문학자로 등용된 아브라함 자쿠토 역시 유대인이었다. 1495년 희망봉을 돌아서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탐험에 앞서서 최종적인 자문을 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쿠토였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스페인이 나섰다. 옆 나라 포르투갈의 독주를 시기와 질투 속에 지켜보던 스페인은 1492년이 되면서 국운이 융성해진다. 1492년은 여러 모로 스페인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이슬람 통치의 오랜 잔재를 뽑아낸 해이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한 해이다. 중세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스페인 유대인공동체가 추방된 해이기도 하다. 세 사건은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상관관계가 숨겨져 있다. 412년 게르만족의 분파인 서고트족과 함께 스페인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이후 1세기 반의 정치적 혼란기에 종교적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589년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리카르도가 국가적인 개종을 단행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의 개종’과 ‘해외추방’ 중에서 택해야 했다.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가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다시금 유대인 역사에 반전이 일어난다. 정복자인 이슬람교도와 함께 추방된 유대인들이 합류하면서 스페인은 이후 5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유대인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소왕국이 뒤섞여 유럽의 3류 국가에 머물던 스페인 역사의 새 장은 1469년 아라곤 왕(페르디난드)과 카스틸레 여왕(이사벨라)이 결혼하면서 열린다. 그들이 결혼하고 10년 뒤 독실한 기독교 제국인 스페인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 사가 입장에서 보면 머지않아 닥쳐올 엄청난 비극의 전조였다. 1492년 1월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왕국인 그라나다를 함락한 스페인은 그 여세를 몰아 8월 1일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고 만다. 유대인들이 추방된 항구에서 출항을 기다리며 정박 중인 세 척의 배가 있었는데 신대륙으로 향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신대륙 발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누구보다 유대인들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박 건조가 유대인들의 압류된 재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선단에는 숙련된 지도 판독자와 통역관, 의사들이 동행했는데 그들 대부분도 유대인들이었다. 콜럼버스는 인도인이 히브리어나 아랍어를 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유대인 통역관인 루이스를 데리고 간 것이다. 신대륙에서 옥수수를 가져와 기근으로 죽어가던 유럽인들을 살린 것도 유대인 루이스에게 돌려야 할 공적이다.
/ 류모세 목사(샬롬이스라엘 담당, <열린다 성경> 시리즈 저자)
작성자 김영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