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칼럼 - 내가 살던 동네, 그 기억의 파편들
장로칼럼
내가 살던 동네, 그 기억의 파편들
흑석동 산 86-1번지. 외할머니가 장독대에서 퍼 오신 한겨울 차가운 김칫국물에 설탕을 적당히 섞어 말아먹던 국수는 여전히 순위변동이 불가한 내 인생 음식으로 남아있다. 서빙고 앞 한강의 절반이 모래사장이던 시절 파란 하늘과 파란 강물은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도동을 훌쩍 넘어 서둘러 떠나간 태풍은 미처 따라가지 못한 구름의 파편들을 남겼지만, 그 사이로 빛나던 노을빛은 눈을 떼래야 뗄 수 없는 장엄함 그 자체였다.
명수대 성당을 다니던 나는 아는 형의 강권으로 동네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때 본 주일학교 선생님의 아우라는 무심코 지나치던 예배당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어두운 밤길을 따라 오며 나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한사코 전하던 동네 누님은 귀찮은 선녀였다. 일사 후퇴 때 북한을 탈출했던 부모님은 트라우마로 평생 자유롭지 못하셨고, 감수성이 예민한 막둥이는 근심이라는 짐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있었다.
현충일이 닥치면 용산역에 도착한 기차는 하얀 상복을 입고 괴나리봇짐을 진 수많은 유가족들을 토해 내었고, 그 행렬은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그곳에서 목 놓아 울던 그들이 다시 길게 줄지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나면 탱크와 비행기가 있던 그곳은 다시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깊은 상처와 그 아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시절에 한강변은 빠르게 변화 되었다.
강 건너 용산 쪽에 높이 올라간 건물이 아파트라는 것을 처음 안 시절 아버지는 “저런 닭장 같은 곳에 사람이 어떻게 사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구입할 수 없는 형편을 의심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와 형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우리 집안의 버팀목이었지만 막둥이는 늘 부모님과 함께 그들을 걱정하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친구의 강권으로 참여한 기독학생연합회는 예배 중이었다. 성가대석 선배들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자리를 찾다 우연히 본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힘찬 찬송 소리는 낯설었지만 무엇인가 있다는 직감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설교 이후 콜링(calling)시간에 본 죄에 대한 환상과 회심은 강권적이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하여서 나의 영혼이 힘을 얻었네~ 오 나의 영혼아 빛을 발하라”
난생 처음 간 수련회가 끝나고 찬양을 부르며 경험한 성령세례는 기쁨의 샘이 터지는 듯하였다. 그렇게 주님은 나를 만나 주셨다. 제일 먼저 눈에 띤 경건서적의 제목이 <염려를 극복하는 길>이었다. 흩어진 퍼즐처럼 산만한 인생은 뭔가 강한 빛줄기를 보았고, 새로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얼마 전 서빙고 모임에 일찍 도착하여 운동 삼아 강변을 걷다가 강 건너 흑석동 산 86-1번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 보기 위해 더 걸어 내려갔다. 날은 저물어 가고 바람은 차가운데 몇 번이고 변한 강산은 네 가구가 살던(그 집 중 한 집은 절친 박윤우의 집이었다) 그 산의 양 쪽이 다 깎여 나가고 아파트 단지 사이에 겨우 끼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물처럼 저 넘어 동네를 휘감아 가고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다시 그리운 얼굴들을 추억해 본다. 그리고 여전히 영적싸움이 치열한 이 땅에서 시린 가슴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 임훈 장로(부천 소망공동체)
명수대 성당을 다니던 나는 아는 형의 강권으로 동네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때 본 주일학교 선생님의 아우라는 무심코 지나치던 예배당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어두운 밤길을 따라 오며 나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한사코 전하던 동네 누님은 귀찮은 선녀였다. 일사 후퇴 때 북한을 탈출했던 부모님은 트라우마로 평생 자유롭지 못하셨고, 감수성이 예민한 막둥이는 근심이라는 짐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있었다.
현충일이 닥치면 용산역에 도착한 기차는 하얀 상복을 입고 괴나리봇짐을 진 수많은 유가족들을 토해 내었고, 그 행렬은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그곳에서 목 놓아 울던 그들이 다시 길게 줄지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나면 탱크와 비행기가 있던 그곳은 다시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깊은 상처와 그 아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시절에 한강변은 빠르게 변화 되었다.
강 건너 용산 쪽에 높이 올라간 건물이 아파트라는 것을 처음 안 시절 아버지는 “저런 닭장 같은 곳에 사람이 어떻게 사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구입할 수 없는 형편을 의심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와 형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우리 집안의 버팀목이었지만 막둥이는 늘 부모님과 함께 그들을 걱정하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친구의 강권으로 참여한 기독학생연합회는 예배 중이었다. 성가대석 선배들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자리를 찾다 우연히 본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힘찬 찬송 소리는 낯설었지만 무엇인가 있다는 직감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설교 이후 콜링(calling)시간에 본 죄에 대한 환상과 회심은 강권적이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하여서 나의 영혼이 힘을 얻었네~ 오 나의 영혼아 빛을 발하라”
난생 처음 간 수련회가 끝나고 찬양을 부르며 경험한 성령세례는 기쁨의 샘이 터지는 듯하였다. 그렇게 주님은 나를 만나 주셨다. 제일 먼저 눈에 띤 경건서적의 제목이 <염려를 극복하는 길>이었다. 흩어진 퍼즐처럼 산만한 인생은 뭔가 강한 빛줄기를 보았고, 새로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얼마 전 서빙고 모임에 일찍 도착하여 운동 삼아 강변을 걷다가 강 건너 흑석동 산 86-1번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 보기 위해 더 걸어 내려갔다. 날은 저물어 가고 바람은 차가운데 몇 번이고 변한 강산은 네 가구가 살던(그 집 중 한 집은 절친 박윤우의 집이었다) 그 산의 양 쪽이 다 깎여 나가고 아파트 단지 사이에 겨우 끼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물처럼 저 넘어 동네를 휘감아 가고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다시 그리운 얼굴들을 추억해 본다. 그리고 여전히 영적싸움이 치열한 이 땅에서 시린 가슴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 임훈 장로(부천 소망공동체)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