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제사장이냐 레위인이냐 선한 사마리아인이냐?”

전문가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얀 반 스코렐(1495~1562년)이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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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지하철에서 생긴 일이다. 지방 강연을 가기 위해 KTX를 타려고 지하철 4호선 플랫폼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고함소리가 났다. ‘누가 아침부터 예의도 없이!’ 나는 구시렁거렸다. 어떤 할아버지가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지팡이를 들고 더 크게 외쳤다. 순간 그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지팡이를 든 그의 손이 더욱 격렬해졌다. 내심 ‘나 말고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겠지’하며 구경꾼 효과(bystander effect;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나설 것으로 생각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를 노리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불안했다. 어눌한 것으로 보아 중풍병 환자인 것 같은데, 먼발치서 봤을 때보다 가까이서 보니 훨씬 젊어 보이는데다 금속으로 된 헌 골프채를 지팡이 삼아 거꾸로 쥐고 있었다. 뭔가 잘못 행동했다가는 한대 얻어맞을 분위기였다. 옷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데다가 몸에서 나는 냄새마저 고약했다. 그의 흐릿한 발음 때문에 재차 되물어야 했다. 지하철을 환승해야 하는데 계단 오르기가 힘이 드니 자신을 부축해달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강력한 손아귀 힘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환승로는 길었고, 계단은 또 얼마나 많은지 땀이 삐질삐질 났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나는 그 미션을 완수하자마자 서둘러 현장을 벗어났다.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손을 비눗물로 씻고 또 씻었다.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침에 보았던 그 노인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국 애리조나대학 심리학과 교수 더글러스 켄릭에 의하면 사람들에게는 7개의 ‘부분자아’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첫 번째가 자기보호(Self-protection) 부분자아, 그 다음이 질병회피(Disease-Avoidance) 부분자아이다. 자기보호 부분자아는 자신의 신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잠재적인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안전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침략자나 맹수들에게 생존을 위협받던 시절부터 몸에 밴 습성일 것이다. 질병회피 부분자아 역시 흑사병, 천연두,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으로부터 모든 부족이 거의 몰살되는 끔직한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한 조상들 때부터 자연스레 질병감염 상황에 민감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위생상태가 불량한 병자인데다가 위협적인 골프채까지 들고 있는 낯선 사람을 보는 순간 나의 자기보호 및 질병회피 부분자아가 동시에 극도로 활성화된 듯하다. 
문득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눅 10:25~37)가 떠올랐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진 채로 구타를 당해 초주검이 된 채 길가에 버려졌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오늘 묵상할 본문이기도 하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자마자 오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오히려 온갖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정성껏 치료해 준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극심한 천대를 받던 경멸의 대명사였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학자의 말에 예수님은 되묻는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율법학자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한다. 예수님은 명령한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오늘 본문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스코렐(1495~1562년)이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미술사가들은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주의와 북유럽 회화의 자연주의를 잘 결합시켰다고 평가한다. 
스코렐의 그림 ‘선한 사마리아인’을 한번 보자. 그는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을 16세기 네덜란드의 한 도시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비교적 성경 본문에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길을 가던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당해 죽을 지경에 놓인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그러나 길을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렇지 않았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1~32). 
스코렐은 그림 오른쪽 중경(中景)과 근경(近景)에 곤경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고 꽁무니 빼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중경에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이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성경책 읽으며 경건을 가장하는 제사장의 위선적인 모습이, 근경에는 권위주의적인 황금색 드레스에 빨간 망토를 걸친 레위인이 역시 곤경에 처한 이웃을 못 본 체하고 길을 떠나고 있다. 
반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려 환자를 정성껏 치료한다. 나귀는 겸손과 인내의 상징이다. 마치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품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34).
 
치유와 구원의 상징적 의식
 
중근동 지역에서 올리브기름은 양식이 되고, 등불을 밝히는 등 생명과 빛을 상징한다. 또한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막 6:13)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기름 부음을 받은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이 내리기 때문에 기름을 붓는 도유(塗油)의식은 기쁨과 권위, 영광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맞은 이웃에게 기름을 발라주는 행위 그 자체가 자비로움으로 이웃을 치료하는 효과도 있지만, 기름 부음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치유와 구원의 상징적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포도주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풍요의 상징이다. 특히 주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는 호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스코렐은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이웃을 정성껏 치료하는 모습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곤경에 처한 이웃은 거의 전라의 몸으로 사마리아인의 무릎에 팔을 걸치고 있다. 그의 몸은 화살처럼 팽팽하다. 미술가들이 말하는 크로스보(crossbow) 자세이다. 사람의 몸을 석궁 모양으로 표현하는 양식을 말한다. 이런 포즈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 예수님께서 받은 고통이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팽팽해진 활시위와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나중에 보상받기 위해서 혹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 프란스 드 발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타인이 내는 고통의 신호에 반응하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원초적 본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얀 반 스코렐이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의 표정에 이런 자비로운 본능이 잘 묘사돼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병약한 노인 한 사람에게조차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지 못했던 ‘못난 이웃’이었던 나는 그의 그림을 보고 무안하고 당혹했다. 그림 속에서 우리 주님은 내게 이렇게 묻고 계신 것 같았다. 
“너는 제사장이냐 레위인이냐 아니면 선한 사마리아인이냐?”  
/ 김진국 집사(융합심리학연구소장, 한강공동체)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