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크리스텐덤과 진정한 하나님 나라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크리스텐덤과 진정한 하나님 나라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란 정치, 경제, 사회, 가정의 영역까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상을 일컫는다. 교회는 원래 로마제국 시대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예배를 금지하는 법을 어기면 감옥에 가두었고, 로마 신을 거부하면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허용했다. 그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화했다. 로마의 가혹한 박해를 받아왔던 기독교인들에게 소위 크리스텐덤의 도래는 분명히 신앙적 자유와 기독교 승리의 상징이 되는 역사였다. 종교 박해가 중단된 것뿐 아니라 압수했던 재산을 돌려주었고, 성직자들은 세금 등의 공적 의무를 면제받았으며 봉건제도에서 귀족들과 함께 특권층으로서 부와 명예를 누렸다.
중세 천년을 지배해오던 크리스텐덤 시대는 기독교의 극심한 타락, 자유적 사고 및 이성으로의 복귀를 기치로 하는 인본주의적 사상과 시민 혁명 등으로 서서히 사라지다가 20세기 말부터 포스트 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시대로 전환되었다. 현대는 무신론적 사상에 기반한 법적 제도의 침입이 가속화되어 아예 안티크리스텐덤(anti-christendum)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더는 세상의 사상과 문화의 주류가 아니다. 청년들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인본주의적 철학에 더욱 매력을 느끼며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땅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묘연해 보이고, 기독교인들의 어깨는 무기력으로 한없이 처지고 있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이 시대에 희망의 불빛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 나라와는 매우 다른 예수님의 크리스텐덤을 기억하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주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죽음 직전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눈에는 비참한 죽음과 패배로 귀결되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도래를 완전하게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프레임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온 우주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왕의 탄생지는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시골 베들레헴의 말구유였다. 그의 족보에는 왕족뿐 아니라 기생과 근친상간과 간통 당사자들이 버젓이 있다. 공생애는 화려한 대관식이 아니라 세례와 하늘의 열림으로 시작되었고, 축하연 대신 괴로운 40일 금식과 마귀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나라의 관료들은 엘리트 교육이나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어부, 세리, 혁명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것과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것이 시민의 자격이었다. 그 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백성을 보고 왕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며, 백성 대신 왕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나라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진정한 크리스텐덤은 사실 인류의 역사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는 크리스텐덤에서의 안일함이나 안티크리스텐덤 시대에서의 무기력함을 생각할 여유와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항상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백성들과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 반기독교 국가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며, 인본주의 사상이 만연한 대학가에도 소리없이 주의 종들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이 돌아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세상적인 기대나 한계에 관계없이 지금도 완성 되어 가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의 반기독교적 제도와 문화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언제나 그 모습은 예수가 생각하던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크리스텐덤과 포스트 크리스텐덤이 그리는 거창한 세상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담론은 매일 각자에게 주어진 소소하고 일상적인 삶의 조각에서 예수님의 목숨으로 담보되었으며 그의 부활로 확정된 크리스텐덤이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가여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왕이 아닌 작고 낮은 우리의 영원한 왕 예수의 이야기이다.
/ 신무환 장로(서빙고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담당)

중세 천년을 지배해오던 크리스텐덤 시대는 기독교의 극심한 타락, 자유적 사고 및 이성으로의 복귀를 기치로 하는 인본주의적 사상과 시민 혁명 등으로 서서히 사라지다가 20세기 말부터 포스트 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시대로 전환되었다. 현대는 무신론적 사상에 기반한 법적 제도의 침입이 가속화되어 아예 안티크리스텐덤(anti-christendum)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더는 세상의 사상과 문화의 주류가 아니다. 청년들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인본주의적 철학에 더욱 매력을 느끼며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땅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묘연해 보이고, 기독교인들의 어깨는 무기력으로 한없이 처지고 있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이 시대에 희망의 불빛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 나라와는 매우 다른 예수님의 크리스텐덤을 기억하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주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죽음 직전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눈에는 비참한 죽음과 패배로 귀결되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도래를 완전하게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프레임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온 우주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왕의 탄생지는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시골 베들레헴의 말구유였다. 그의 족보에는 왕족뿐 아니라 기생과 근친상간과 간통 당사자들이 버젓이 있다. 공생애는 화려한 대관식이 아니라 세례와 하늘의 열림으로 시작되었고, 축하연 대신 괴로운 40일 금식과 마귀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나라의 관료들은 엘리트 교육이나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어부, 세리, 혁명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것과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것이 시민의 자격이었다. 그 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백성을 보고 왕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며, 백성 대신 왕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나라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와 진정한 크리스텐덤은 사실 인류의 역사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는 크리스텐덤에서의 안일함이나 안티크리스텐덤 시대에서의 무기력함을 생각할 여유와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항상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백성들과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 반기독교 국가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며, 인본주의 사상이 만연한 대학가에도 소리없이 주의 종들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이 돌아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세상적인 기대나 한계에 관계없이 지금도 완성 되어 가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의 반기독교적 제도와 문화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언제나 그 모습은 예수가 생각하던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크리스텐덤과 포스트 크리스텐덤이 그리는 거창한 세상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담론은 매일 각자에게 주어진 소소하고 일상적인 삶의 조각에서 예수님의 목숨으로 담보되었으며 그의 부활로 확정된 크리스텐덤이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가여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왕이 아닌 작고 낮은 우리의 영원한 왕 예수의 이야기이다.
/ 신무환 장로(서빙고공동체, 온누리세계관학교 담당)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