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굽게 하지 마라
이재훈 목사
2010년 우리나라에 ‘정의열풍’이 불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1년 만에 123만부이상 팔리면서 일어난 열풍입니다. 읽기도 쉽지 않은 정치철학 도서가 그렇게 많이 팔리자 모두가 놀랐습니다. 정작 미국에서는 10만부 정도밖에 팔리지 않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팔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나라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기간 동안 이루어진 설문조사를 보면 우리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5%에 불과했습니다. 59퍼센트는 우리나라가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법을 지키면 오히려 손해 보는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의에 대한 열망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확산 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정의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정의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보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정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정의는 관념적이거나 철학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와 그의 집안 자손들에게 명해 여호와의 길을 지켜 의와 공의를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을 그를 위해 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창 18:19).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 후손들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것은 의와 공의를 실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의와 공의란 단어가 성경에 수십 번 이상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게 하신 것도 정의를 위해서입니다. 출애굽도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을 압제하는 애굽인들을 향해 정의를 행하시고, 그들을 자유케 하심으로 정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선언입니다. 증언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가나안 족속들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곧 하나님의 정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서 악하게 행하면 그들도 정의의 대상이 됩니다. 가나안 족속이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정의의 대상입니다. 그 결과가 바벨론 심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그들에게도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의와 공의를 행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정의,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
“여호와께서는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며 이 땅은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시 33:5).
히브리어로 의와 공의는 뜻이 다릅니다. 공의는 정의라는 단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의는 올바른 관계, 마땅히 있어야 할 관계를 설명합니다. 기초적인 정의입니다. 공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잘못되었을 때, 심판을 하거나 올바르게 교정해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심판에 해당되는 정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의가 제대로 되어 있으면 공의가 필요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존재했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가 필요하고, 공의가 필요합니다. 공의와 정의를 회복하기 전에 먼저 의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인자는 인애와 사랑을 합친 말입니다. 정의는 공의라고 번역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정의이지만 내면에는 은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정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여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정의를 부르짖을 때 방향을 잘못 잡는 이유는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된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분노에서 비롯된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흘러나와야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의를 주장하고, 누군가를 정의롭게 심판한다면 그만큼 내 안에 사랑이 충만해야합니다. 마음속에 인자한 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처럼 보이지만 파괴가 될 수 있습니다. 정의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거짓되고 왜곡된 사랑일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마음에 인자한 사랑을 품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방법
여러분, 정의가 무엇입니까.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공평함입니다. 율법에서 행하라는 정의는 모두 사랑에서 나오는 공평함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추수할 때 이삭을 다 줍지 말고, 모퉁이의 이삭은 내버려두고, 옮기다 흘린 이삭은 줍지 말고, 가난한 이들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제사를 집행하고 국가를 운영하는데 드렸는데 3년 만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였습니다.이 십일조를 행하는 것이 정의로운 삶입니다. 7년마다 안식년이 오고, 그 안식년이 일곱 번째 오는 해를 희년이라고 불렸습니다. 희년에는 빚만 탕감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의 원소유자들도 복귀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각 족속, 각 가족들에게 할당되었던 토지가 완벽하게 정상화됩니다. 많은 빚을 진 사람도 있고,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을 텐데 50년째가 되면 모두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살면서 큰 실패를 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정의가 실천되는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희년제도와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 제도,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두는 제도는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공평한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잘못했을 때 심판하는 정의 이전에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정의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정의로운 삶을 삽니다. 많은 형벌을 가해야 사회가 정의로워지고, 세상이 정의로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수록 덜 이기적이 되고, 더 정의롭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는데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산다면 은혜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말로는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지만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삽니다. 진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정의를 행합니다.
은혜가 정의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하나님의 율법에서 말하는 정의의 차이입니다.
거짓을 제거하라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의로운 삶에 대한 몇 가지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정의를 굽게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굽게 하는 첫 번째 요소는 거짓입니다.
“헛소문을 퍼뜨리지 마라. 악인들 편에 서서 악한 증인이 되지 마라”(1절).
“거짓된 일에 휘말리지 말고 죄 없는 의인들을 죽이지 마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물을 받지 마라.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의인의 말을 왜곡시킨다”(7~8절).
여기에 보면 거짓된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헛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왜곡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정의를 굽게 하는 것입니다. 또 거짓된 일에 휘말리고 뇌물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뇌물은 뇌를 굴리면서 받는 것입니다. 선물은 선뜻 받을 수 있는 것이 선물입니다. 거짓은 지혜로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의인의 말을 왜곡시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탄은 거짓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거짓된 입술, 거짓된 마음이 불순종을 만들어냄으로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사탄은 거짓을 사랑하고, 거짓된 일을 하는 사람만 통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작은 거짓이 얼마나 큰 위험을 만듭니까. 작은 거짓 하나가 얼마나 큰 공동체를 파괴합니까.
내 마음에 있는 상처가 거짓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구속된 심령에도 거짓은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정의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거짓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아라
정의를 굽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편협함과 치우침입니다.
“군중을 따라 악을 행하지 마라. 네가 법정에 서서 증언을 할 때 다수의 편에 서서 공의를 그르치는 일이 없게 하여라”(2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수결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민주주의 최고의 위험은 포퓰리즘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수가 정의를 굽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편드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3절).
“너는 소송에서 가난한 백성이라고 해서 편들어서는 안 된다”(6절).
성경에 가난한 자를 돌보고 구제하라는 명령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편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부유하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된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치우치면 안 됩니다. 편협한 치우침이 정의를 굽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약자도 거짓되면 심판하십니다. 약자라고 해서 그것이 무기가 되어 공평을 무너뜨리면 정의를 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균형을 강조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치우치지 않은 균형입니다.
미워하지 말라
정의를 굽게 하는 세 번째 미움입니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서 비롯된 공평함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미움이 생기는 순간 정의를 굽게 할 수 있습니다.
“네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 잃은 것을 보면 반드시 주인에게 데려다 주어라. 네가 만약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이 너무 무거워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면 거기 그냥 놔두지 말고 반드시 도와 일으켜 주어라”(4~5절).
원수의 소와 나귀가 길을 잃었습니다. 원수의 소와 나귀입니다. 원수가 소와 나귀를 찾고 다니는데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원수지만 찾아주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을 행하는 것이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이 많아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일으켜 세워야합니다.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정의를 굽게 합니다. 이 얼마나 세상과 다른 정의입니까. 세상의 정의는 원수에게 복수하고, 나를 미워하면 같이 증오하고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옳다고 주장하며 피 흘리고 싸우는 것입니다. 원수의 소와 나귀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길을 잃고 있으면 찾아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미국의 인종차별 폐지 운동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강조했던 것은 분노와 미움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것은 정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과 용서가 가득했습니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백인을 미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백인에 대한 분노로 인종차별폐지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학대하고, 미워한 백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흑인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정의를 부르짖었기에 사회가 변화된 것입니다. 만약 그가 백인에 대한 미움에서 시작해 인종차별운동을 했더라면 미국은 변화되지 못하고 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정의로운 외침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가 변화되지 않을까요. 진정한 사랑과 용서에서 비롯된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라
“이방 사람을 억압하지 마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 사람이었으니 이방 사람의 마음을 잘 알 것이다”(9절).
원수에 대한 미움이 정의를 굽게 하고, 이방사람에 대한 무관심이 정의를 굽게 합니다.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직접적인 가혹행위는 억압입니다. 보이지 않는 무관심과 냉대도 억압입니다. 우리가 낯선 이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정의입니다. 전 세계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중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과거 백인들이 흑인들을 차별하고 학대한 것 같은 현상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은 무관심과 냉대와 배척이 심합니다. 우리는 이방사람들을 억압하지 않았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땅의 많은 이방인들은 억압받고 있습니다. 이방사람들은 꼭 외국인 노동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도 이방인입니다. 주변에 무관심과 냉대로 소외된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 것도 정의를 굽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세이비어교회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면서 사회선교로 영향력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고든 코스비 목사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제자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는 가난하고 무력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는 쓰레기처리장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지켜줄 사람 그들의 권리를 대변해 줄 단 한 사람도 없어 속으로 한을 삭이며 삽니다. 우리는 그들을 감옥이나 병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복지기관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사회의 귀찮은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편안한 자리에서 눈을 내리깔고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만일 버림받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당신은 순식간에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며 당신이 그 동안 만끽했던 모든 특권과 지위와 기회를 내려놓고 그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위를 향한 운동이 아닌 아래를 향한 운동 낮아질 대로 낮아져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 당신은 오직 그리스도께 기대게 됩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질 때에야 그동안 외면했던 이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낮아질 대로 낮아질 때 그동안 외면했던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그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낮은 곳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갈 때 비로소 이방인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의를 굽게 하는 편협함을 내쫓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정의를 굽게 하는 미움과 무관심과 냉대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를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