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이재훈 목사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 태어난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나신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백성들 마음속에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배역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문을 두드리시고, 이 세상에 가득한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죄의 세력을 무효화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 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CS 루이스가 쓴 ‘하나님의 침공’이라는 글에서 예수님을 ‘진정한 왕이신 그분이 반역한 지역을 다시 점령하기 위하여 들어오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로 죄를 씻기시고, 다시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구약의 역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이루실 일들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실체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언어를 통해 의미를 깨닫기 전에는 그림을 통해서 의미를 깨닫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깨닫는 것은 이미 본 그림들의 의미를 채워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구약이 그림이라면 신약은 문자에 불과합니다. 외화를 볼 때 그림만 봐서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막이 있어야 합니다. 신약이 자막이라면 화면은 구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건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서도 장차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모세를 통해 만들라고 한 성막입니다,
성막은 장차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거하신다’는 단어를 직역하면 장막 텐트를 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처럼 독특한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사건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육신의 장막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사건은 장막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장막은 ‘거룩한 장막’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회막(만나는 장소)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위해 성소를 만들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 살 것이다”(8절).
장막은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에서 살기 위해 만든 장소입니다.
“거기서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날 것이니 그 장막이 내 영광으로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내가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할 것이다. 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해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출 29:43~45).
이것이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 계획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려는 목적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을 보십시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어디서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장소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시내산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성막의 청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막이 다 만들어진 후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내려오심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오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자원함으로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
하나님은 백성들을 만나실 때 모세를 통해서만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방법으로 만나셨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절차를 따라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막 이미지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 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막의 물품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영적으로 해석해서 하지는 않겠습니다. 전체적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만나주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원함으로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통해 재료들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하여라. 자원해서 예물을 드리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가 내 예물을 받아 와야 할 것이다”(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에 있습니다. 광야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원해 드리는 예물로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자원함으로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의무적으로 합니다. 만약 세금을 내고 싶은 사람만 자원해서 내게 한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강제로 징수해도 피해가려고 하는데 자원해서 세금을 낸 것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자원함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자원함이 넘치는 영성입니다.
인생을 움직이는 세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마음속 이기심을 따라 했다면 그것은 본능입니다. 아무리 많은 성취를 하고,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겨도 그것이 본능에 충실한 삶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원하지 않지만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눈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는 것입니다. 정말 피곤한 인생입니다.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원해서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스스로 자원하는 것은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삶을 사느냐가 우리 영혼의 상태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자원하는 사람들의 예물을 받아 성막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재료들을 보면 싼 재료도 있지만 비싼 재료도 있습니다. 과연 그 재료들을 충당 할 수 있을지 두렵고 염려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연약한 생각이었습니다. 모세가 청사진을 받은 이후 백성들에게 자원함으로 예물을 드릴 사람을 말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성막을 만드는 기술자가 그만 가져오라고 사정을 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언제나 마음속에 자원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 시대에 가면 하나님이 자원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 때도 성전을 짓고자하는 백성들이 넘쳤났습니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분
둘째, 하나님은 성막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을 차등적으로 제한하셨습니다. 이것은 거룩함의 차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막은 크게 세 장소로 구분됩니다.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고, 뜰이 있습니다. 뜰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소는 제사장과 레위인들만 갈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한차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차등을 두셨습니까.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덧입혀 주시는 거룩함을 입지 않으면 우리 마음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입니다. 반드시 거룩함을 입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막을 짓기 위해 다양한 재료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재료 중에 아주 정교하고 고운 실들이 있었습니다. 3절에 금, 은, 청동, 4절에 청색실, 자주색실, 홍색실, 고운베실이 나옵니다. 염소털도 있습니다. 고운 베실이 있는가 하면 염소털도 있습니다. 재료가 모두 중요하지만 차등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가치가 다릅니다. 안쪽으로 갈수록 귀한 재료로 만들어졌고, 바깥에는 상대적으로 덜 귀한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인 동시에 우리 마음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거룩함의 길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희생제사가 있습니다. 죄악 된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합니다. 번제단에서 피 흘려 죽는 제물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면서 성막에서 수없이 많은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죄악 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감동이 없는 것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가르칠 때 레위기부터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은 왜 딱딱하고 재미없는 제사 제도들을 먼저 가르칠까요. 성막에서 드려지는 많은 제사들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감격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며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막과 제사 제도를 통해 우리가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휘장이 막혀 있는 것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벽이 허물어짐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성막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몇 십 미터 거리입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그렇게 원하시는데 왜 만날 수 없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막 위의 구름기둥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
셋째, 하나님은 성막을 이동할 수 있는 구조로 제작하게 하셨습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들은 이동할 수 있는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법궤입니다. 거기에는 모세의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법궤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이동할 수 있도록 채가 달려 있어 언제든지 들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번제단도 판넬로 만들고 겉을 도금했습니다. 쉽게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습니다. 테두리도 분리해서 운반할 수 있도록 조립식이었습니다. 장막을 이동식으로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 장막을 통해 백성들의 중심에 거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려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동행하시면서 뒤따라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머무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을 쳤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이 길을 떠나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은 진을 치고 머물렀습니다”(민 9:17~18).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기둥으로 임재 했습니다. 성막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성막 위를 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땅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위를 보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성막 위에 임한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따라 움직입니다. 때로는 1년 동안 머물러 있을 때도 있고, 며칠 만에 이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성막의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여야 했습니다. 어느 한곳에 머무르는 인생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순례자입니다.
“이틀이고 한 달이고 1년이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르면 이스라엘 자손은 집에 머무르고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구름이 떠오르면 그들은 길을 떠났습니다”(민 9:22).
왜 하나님은 백성들이 움직이도록 하셨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따라 가면 가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막 위의 구름기둥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지역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성막 위의 구름기둥을 보면서 살아야합니다. 성막이 중앙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동성 있게 만든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완전히 없어지고, 휘장이 찢어져 하나님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속에 늘 자원하는 심령이 흘러 넘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단순 거주자가 아니라 왕으로써, 주인으로써, 지배자로써 거하시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