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사귐, 기쁨
이재훈 목사
요한일서 주제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이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된 시기는 주후85년경입니다. 사도요한은 사도들 가운데는 가장 오래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많은 권면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요일 5:13).
이것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이 말씀에는 요한일서를 읽는 독자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쓴 글입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서도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축복과 은혜가 무엇인지, 그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구원파입니다. 매우 위험한 이단입니다. 확신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는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축복을 누려야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 축복을 누리게 하려고 기록된 책이기에 기록된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4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3절).
요한일서를 기록한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을 한 문장으로 연결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확신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 둘째는 사귐, 셋째는 축복입니다. 그 축복이 바로 기쁨입니다.
생명, 사귐, 기쁨(축복)은 논리적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시고, 그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공동체가 사귐을 갖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우리가 주목했고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 앞에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 전파합니다”(1~2절).
생명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장 1절을 떠올려야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참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라는 것은 헬라의 철학 용어입니다. 헬라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는데 헬라 철학의 중심이 되는 키워드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 이성입니다. 우주만물이 그냥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만물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는데 그것을 절대 이성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요한은 헬라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상황적 메시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만 하면 막연해 보이고, 피부에 닫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익숙한 시대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용어를 사용해 하나님을 변증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만물을 움직이는 로고스가 육신이 된 충격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Flesh’이고, 헬라어로는 ‘싹스’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덩어리를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썩어질 육신이라는 것입니다.
헬라 시대에는 이원론이 팽배했습니다. 몸은 무덤이다.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었던 헬라 시대에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고, 파격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설명했는데 요한일서에서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나오긴 하지만 생명이라는 단어에 더 중점을 뒀습니다. 요한일서는 생명과 말씀을 연결해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그 말씀을 우리가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주목했고, 손으로 만져보았고, 그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 생명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신비적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생명이요,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누구를 의미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육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사도요한은 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왜 그렇게 어렵게 설명했을까요. 두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첫째, 당시 요한일서를 읽는 헬라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언어가 무엇인지가 중요했습니다. 당시 요한일서를 읽는 독자들은 교회의 위기는 바로 그 시대의 철학으로 인해 복음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세대 사도들이 복음에 대한 확신과 십자가 부활의 진리를 누리고 살았던 시대가 지나고 주후 8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이차적으로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과 그 시대의 철학사상에 동시에 물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변형시키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거짓교훈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교훈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복음도 받아들이고, 헬라 시대 철학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원적인 시각에 빠져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헬라시대 사람들은 메시야가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육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육신을 입었던 것처럼 보였다고 믿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입니다”(요일 4:2).
4장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시대의 악한 영을 분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영을 믿은 것이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은 자는 거짓 영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가장 위험한 이단은 예수님이 진정한 사람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살아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믿기 어려워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단은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 예수님에 관한 가장 큰 도전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세기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줍니까. 예수님의 신성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증인들이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을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본체시오, 신성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동일한 체험
“그러나 이것들이 기록된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 20:31).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요한일서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이 갈릴리 호숫가를 예수님과 함께 거닐고, 예수님 육신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체험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체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차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살아계신 생명이신 그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방식은 시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기질마다 만나는 모습이 다를지라도 사도요한이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는 체험을 했던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도시대에 경험했던 영원한 생명을 오늘 이 시대에도, 이후 세대에도 동일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들만의 체험이 아니라 우리도 동일하게 체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체험이 동일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객관적 진리에 근거한 체험입니다. 그분이 실제로 살아 존재하기에 한국에서나, 아프리카에서나, 중국에서나, 러시아에서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이식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3절).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죄 용서를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은 가르침을 듣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죽어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이전에 우리가 가진 최고의 축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과의 사귐도 끊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영원한 생명을 다시 공급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 받아야 합니다. 장기이식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식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이식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수술대입니다. 십자가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이식됩니다.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
3절에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제가 현재입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계속된 현재입니다.
여러분, 사귐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만남을 사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귐은 지속적이고,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만남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대화가 깊어져야 합니다.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 사귐이 계속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 결과가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4절).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의 지속적인 사귐에는 반드시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너희도 이와 같다. 너희가 지금은 슬퍼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볼 때는 너희가 기뻐할 것이요, 또 너희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요 16:22).
“주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빌 4:4).
이 기쁨은 감각적인 즐거움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공급받는 힘입니다. 때로 환난을 당할지라도 육신의 죽음 앞에 직면할지라도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공급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사도요한은 우리가 이 기쁨을 날마다 누리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누려야 될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누리는 기쁨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쁨이 넘치면 반드시 사도요한처럼 전파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더 깊이 누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십시오. 그 사귐의 축복을 모르는 사람들을 초대하십시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