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 '걸레성자 손정도'의 이웃사랑과 민족사랑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걸레성자 손정도’의 이웃사랑과 민족사랑
크리스천은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사람일까? 예수님이 그 모델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이자 삶의 방향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훈련이 있다. 삶의 아주 작은 선택의 순간에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질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얼마 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의 답을 믿음의 삶으로 보여준 신앙의 선배가 재조명됐다. 그 주인공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손정도 목사(1872~1931)다. 지난달 24일 공영방송 KBS에서 ‘걸레성자 손정도’를 제목으로 손정도 목사의 삶을 조명한 특집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수 믿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배웠다. 한평생 이름도 빛도 없이 독립운동가로, 목사로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산 손정도 목사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한 편 보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의 답을 믿음의 삶으로 보여준 신앙의 선배가 재조명됐다. 그 주인공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손정도 목사(1872~1931)다. 지난달 24일 공영방송 KBS에서 ‘걸레성자 손정도’를 제목으로 손정도 목사의 삶을 조명한 특집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수 믿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배웠다. 한평생 이름도 빛도 없이 독립운동가로, 목사로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산 손정도 목사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한 편 보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손정도 목사가 ‘걸레성자’라 불렸던 이유가 있다. 그의 삶과 목회철학이 ‘걸레정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손정도 목사의 고백에 그의 일평생 철학이 잘 담겨 있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된다. 나는 걸레의 삶을 살겠다.”
손정도 목사는 187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유림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별 탈 없이 자라던 손 목사는 1902년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중 한 가정집에 머물게 됐는데 그곳은 조씨 성을 가진 목사의 집이었다. 그날 밤 손정도 목사는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날로 손정도 목사는 상투를 자르고,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쉈다. 안락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비단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날 이후 손정도 목사는 친척들에게 패륜으로 낙인 찍혀 위협을 받으며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손정도 목사는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다.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던 손정도 목사는 1910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다. 그곳에서 조성환과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총리 암살음모사건으로 손정도 목사를 잡아들인다. 하얼빈에서 체포된 손정도 목사는 전기고문과 불로 지지는 고문 등 참혹한 고초를 겪는다. 그 모진 고문 앞에서도 독립운동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고문이 내 몸을 죽일지라도 내 영혼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진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주민들을 위해 봉사와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2년 동안 유배생활을 마치고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서는 민족의 혼을 깨우는 설교를 했다. 나라를 빼앗긴 성도들에게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즈음 다 시 한번 인생을 뒤바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고종과의 만남이었다. 고종은 아들 이강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사행을 추진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조력자로 손정도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손정도 목사는 급히 목회활동을 정리하고 나라를 위해 고난의 길로 또다시 뛰어들었다.
손정도 목사는 독립운동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상해 임시정부 출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김구와는 무장단체 의용단과 한국노병회, 안창호와는 흥사단, 박은식과는 대한교육회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다. 손정도 목사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에 임시정부에서 벌어진 내부 파벌싸움에 크게 실망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만주 길림으로 갔다. 그곳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고 헌신한다.
만주로 떠난 손정도 목사가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일이 있다. 바로 ‘호조운동’이었다. 그는 서로 도우며 자급자족하는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실제 손정도 목사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조선난민들을 위해 헌납했다. 조선난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온 힘을 다했다. 그곳에서도 손정도 목사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며 “이웃사랑과 민족사랑”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그는 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정도 목사는 그토록 소망하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60세에 사망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린 데다 자신보다 민족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헌신했던 그의 열정이 건강을 앗아간 탓이었다. 평생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약한 자의 편에 서서 봉사하며 헌신한 손정도 목사의 걸레정신이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된다. 나는 걸레의 삶을 살겠다.”
손정도 목사는 187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유림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별 탈 없이 자라던 손 목사는 1902년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중 한 가정집에 머물게 됐는데 그곳은 조씨 성을 가진 목사의 집이었다. 그날 밤 손정도 목사는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날로 손정도 목사는 상투를 자르고,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쉈다. 안락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비단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날 이후 손정도 목사는 친척들에게 패륜으로 낙인 찍혀 위협을 받으며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손정도 목사는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다.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던 손정도 목사는 1910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다. 그곳에서 조성환과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총리 암살음모사건으로 손정도 목사를 잡아들인다. 하얼빈에서 체포된 손정도 목사는 전기고문과 불로 지지는 고문 등 참혹한 고초를 겪는다. 그 모진 고문 앞에서도 독립운동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고문이 내 몸을 죽일지라도 내 영혼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진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주민들을 위해 봉사와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2년 동안 유배생활을 마치고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서는 민족의 혼을 깨우는 설교를 했다. 나라를 빼앗긴 성도들에게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즈음 다 시 한번 인생을 뒤바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고종과의 만남이었다. 고종은 아들 이강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사행을 추진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조력자로 손정도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손정도 목사는 급히 목회활동을 정리하고 나라를 위해 고난의 길로 또다시 뛰어들었다.
손정도 목사는 독립운동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상해 임시정부 출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김구와는 무장단체 의용단과 한국노병회, 안창호와는 흥사단, 박은식과는 대한교육회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다. 손정도 목사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에 임시정부에서 벌어진 내부 파벌싸움에 크게 실망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만주 길림으로 갔다. 그곳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고 헌신한다.
만주로 떠난 손정도 목사가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일이 있다. 바로 ‘호조운동’이었다. 그는 서로 도우며 자급자족하는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실제 손정도 목사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조선난민들을 위해 헌납했다. 조선난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온 힘을 다했다. 그곳에서도 손정도 목사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며 “이웃사랑과 민족사랑”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그는 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정도 목사는 그토록 소망하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60세에 사망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린 데다 자신보다 민족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헌신했던 그의 열정이 건강을 앗아간 탓이었다. 평생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약한 자의 편에 서서 봉사하며 헌신한 손정도 목사의 걸레정신이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