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보라!”
전문가 기고
명화로 읽는 성경
카라바조와 치세리의 ‘에케 호모(Ecce Homo)’
왕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각종 보석으로 장식한 왕관이다. 화려한 복장과 더불어 장식용 지휘봉이라고 할 수 있는 홀(笏; 관원이 관복을 입었을 때 손에 지니는 수판)도 통치자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왕관과 복식이 아니라 가시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면류관, 홀처럼 생긴 갈대나무, 누더기 같은 보라색 망토를 어깨에 걸친 차림으로 조롱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역대 화가들이 가장 즐겨 그린 소재 중 하나였다.
카라바조가 그린 ‘에케 호모((Ecce Homo)’ 역시 그런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다만 다른 화가들이 그린 빌라도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소심하고 불안한 모습이라면, 카라바조가 그린 빌라도는 군중들을 향해서 “이 사람을 보라!”고 태연자약하게 요구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강변하는 표정이 다른 그림들과 무척 대조적이다.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제사장들의 선동에 의해 격동되어 있는 군중들 앞에 세운다. 그리고는 외친다. “에케 호모!”
라틴어 ‘에케 호모’는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이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상황을 회피하기에 급급했을까?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이다. 함께 묵상할 그림은 카라바조의 ‘에케 호모’(1606년)와 안토니오 치세리가 그린 같은 이름의 ‘에케 호모’(1871년) 이렇게 두 점이다.
카라바조가 그린 ‘에케 호모((Ecce Homo)’ 역시 그런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다만 다른 화가들이 그린 빌라도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소심하고 불안한 모습이라면, 카라바조가 그린 빌라도는 군중들을 향해서 “이 사람을 보라!”고 태연자약하게 요구하는 모습이 특징이다.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강변하는 표정이 다른 그림들과 무척 대조적이다.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제사장들의 선동에 의해 격동되어 있는 군중들 앞에 세운다. 그리고는 외친다. “에케 호모!”
라틴어 ‘에케 호모’는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이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상황을 회피하기에 급급했을까?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이다. 함께 묵상할 그림은 카라바조의 ‘에케 호모’(1606년)와 안토니오 치세리가 그린 같은 이름의 ‘에케 호모’(1871년) 이렇게 두 점이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 의해 끌려 나오시기 전의 상황을 한번 정리해보자.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 예수님은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사람들은 승리의 상징, 부활의 상징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다.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요 13:1) 모습을 보이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모습은 세상의 기존 전통과 규칙을 뒤엎는 섬김의 리더십의 전범(典範)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은 당신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선포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또한 당신이 포도나무임을 선포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즈음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셨고(마 21:1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엄중하게 질책하셨다(마 23:2~3).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너무나 불경하고 위험한 예수님 같은 인물을 그냥 좌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돈으로 매수한 유다를 앞세워 캄캄한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긴급체포한다.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집으로 예수님을 끌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문했지만 증거도 없이 무고한 예수님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 있다면 그 잘못한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은 말을 했다면 어째서 나를 치느냐?”(요 18:23).
그들이 소집한 최고의회(산헤드린)는 다짜고짜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다. 사형집행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예수님과 빌라도가 만나게 되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네 생각이냐 다른 사람한테 들은 말이냐? 너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럼 네가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냐?”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께 “그럼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대답도 듣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영리한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하자마자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금방 알아챈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놓아줘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놀란 빌라도는 병사들을 시켜 예수님을 채찍질했다. 그리고는 가시나무관을 엮어 씌우고, 보라색 옷을 입혀 군중들 앞에 다시 세웠다.
“보라, 이 사람을(에케 호모)!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은 당신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선포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또한 당신이 포도나무임을 선포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즈음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셨고(마 21:1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엄중하게 질책하셨다(마 23:2~3).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너무나 불경하고 위험한 예수님 같은 인물을 그냥 좌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돈으로 매수한 유다를 앞세워 캄캄한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긴급체포한다.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집으로 예수님을 끌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문했지만 증거도 없이 무고한 예수님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 있다면 그 잘못한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은 말을 했다면 어째서 나를 치느냐?”(요 18:23).
그들이 소집한 최고의회(산헤드린)는 다짜고짜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다. 사형집행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예수님과 빌라도가 만나게 되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네 생각이냐 다른 사람한테 들은 말이냐? 너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럼 네가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냐?”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께 “그럼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대답도 듣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영리한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하자마자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금방 알아챈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놓아줘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놀란 빌라도는 병사들을 시켜 예수님을 채찍질했다. 그리고는 가시나무관을 엮어 씌우고, 보라색 옷을 입혀 군중들 앞에 다시 세웠다.
“보라, 이 사람을(에케 호모)!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오늘 묵상하는 카라바조의 그림이나 안토니오 치세리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포착했다. 치세리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에케 호모’ 그림은 정면을 향해 예수님이 혼자서 혹은 빌라도와 함께 서 계신다. 치세리의 그림은 시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군중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치세리의 그림 오른쪽에는 빌라도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이 등을 돌려 군중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녀도 남편처럼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은 물론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심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법이 있는데 그 법에 따르면 이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 19:7).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자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요 19:8)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빌라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하진 않지만 유대왕국의 왕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군중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요 19:15)는 말을 반복할 까닭이 없다.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 3개 국어로 명패를 붙이게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대제사장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하자 “내가 쓸 것을 썼다”(요 19:22)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빌라도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심리학자 샌 포드의 말처럼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실재의 사람인 빌라도가 영적이고 원형적인 실재인 예수님을 만나는 대사건이었다. 심리학적으로는 빌라도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중차대한 순간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깊은 감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제사장들을 비롯한 군중들의 집단적 사고, 로마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직접 대면까지 하고도 결국 ‘구태의연한 자기(old self)’에 매몰되어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new self)’로 거듭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빌라도. 이때 빌라도가 회심했더라면 사도 바울 이상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의 힘과 권력 그리고 군중의 힘에 압도되었다. 빌라도를 압도한 군중의 힘을 치세리는 화면 한가운데에서 빌라도를 바라보는 아니 우리를 바라보는 군중의 성난 눈과 입을 통해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치세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이 혹시 빌라도 아닌가? 아니면 저 성난 군중의 한 사람인가?”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치세리의 그림 오른쪽에는 빌라도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이 등을 돌려 군중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녀도 남편처럼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은 물론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심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법이 있는데 그 법에 따르면 이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 19:7).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자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요 19:8)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빌라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하진 않지만 유대왕국의 왕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군중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요 19:15)는 말을 반복할 까닭이 없다.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 3개 국어로 명패를 붙이게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대제사장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하자 “내가 쓸 것을 썼다”(요 19:22)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빌라도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심리학자 샌 포드의 말처럼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실재의 사람인 빌라도가 영적이고 원형적인 실재인 예수님을 만나는 대사건이었다. 심리학적으로는 빌라도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중차대한 순간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깊은 감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제사장들을 비롯한 군중들의 집단적 사고, 로마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직접 대면까지 하고도 결국 ‘구태의연한 자기(old self)’에 매몰되어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new self)’로 거듭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빌라도. 이때 빌라도가 회심했더라면 사도 바울 이상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의 힘과 권력 그리고 군중의 힘에 압도되었다. 빌라도를 압도한 군중의 힘을 치세리는 화면 한가운데에서 빌라도를 바라보는 아니 우리를 바라보는 군중의 성난 눈과 입을 통해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치세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이 혹시 빌라도 아닌가? 아니면 저 성난 군중의 한 사람인가?”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발문>
화면 한가운데에서 빌라도를 아니 우리를 바라보는
군중의 성난 눈과 입을 통해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혹시 빌라도 아닌가? 아니면 저 성난 군중의 한 사람인가?”
군중의 성난 눈과 입을 통해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혹시 빌라도 아닌가? 아니면 저 성난 군중의 한 사람인가?”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