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신앙에세이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오래 전, 그러니까 첫째가 태어난 즈음에 한 방송사에서 방영하던 ‘내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꼼꼼히 챙겨보았던 때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는 매회 통제 불능 아이들이 나온다. 유심히 보니 그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부모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사랑의 전달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사랑의 전달방식에 문제가 있어서 부모의 사랑이 아이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결국 통제 불능 삶의 패턴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워낙 강아지를 좋아해서 강형욱 씨가 개를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그 프로그램에도 통제 불능 개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견주가 문제였다. 대부분 주인의 절제 없는 사랑과잉이 문제견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통제 불능의 자녀도, 통제 불능의 개들도 부모와 견주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잘못된 방식의 사랑이 문제였다. 절제 없는 사랑의 방식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롬 1:25).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모든 대상은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둘 때 우리가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사랑하기에 절제 없는 사랑을 쏟아 붓는다. 너무 사랑하는 자녀에게 완벽한 삶을 선물하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방향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작은 것 하나까지 통제한다. 그것을 부모의 사랑의 결정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방식이 오히려 자녀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자녀들의 삶이 엇나가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둘 때 그것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함을 보게 된다.
아이들을 지나치게 사랑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에 비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부족했던 것의 결말이 잘못된 방식의 절제 없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거스틴의 말처럼 ‘향유하는 사랑’이 있고, ‘사용하는 사랑’이 있다. 향유의 자리에 사용하는 사랑을 올려놓으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삶이 무질서하게 된다.
자녀가 우상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어떤 부모들은 완벽한 자녀를 원하기 때문에 아주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훈련을 시키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로 위로하지만 소용 없다. 그것이 마음의 우상 때문임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자녀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버릇없는 응석받이로 키울 수도 있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훈계의 균형이 아니다. 그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균형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확실한 길이다.
과도한 사랑은 언제나 집착으로 변질되고, 적당한 거리를 무시한 사랑은 무례한 사랑으로 변신한다. 때문에 최고의 자녀교육이란 어쩌면 부모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건강한 부모를 통해 건강한 관계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우상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있다. 아빠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과연 이 녀석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문제는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나의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 이길탁 목사(강남D공동체)
우리 가족은 워낙 강아지를 좋아해서 강형욱 씨가 개를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그 프로그램에도 통제 불능 개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견주가 문제였다. 대부분 주인의 절제 없는 사랑과잉이 문제견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통제 불능의 자녀도, 통제 불능의 개들도 부모와 견주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잘못된 방식의 사랑이 문제였다. 절제 없는 사랑의 방식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롬 1:25).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모든 대상은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둘 때 우리가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사랑하기에 절제 없는 사랑을 쏟아 붓는다. 너무 사랑하는 자녀에게 완벽한 삶을 선물하기 위해 부모가 원하는 방향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작은 것 하나까지 통제한다. 그것을 부모의 사랑의 결정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방식이 오히려 자녀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자녀들의 삶이 엇나가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둘 때 그것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함을 보게 된다.
아이들을 지나치게 사랑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에 비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부족했던 것의 결말이 잘못된 방식의 절제 없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거스틴의 말처럼 ‘향유하는 사랑’이 있고, ‘사용하는 사랑’이 있다. 향유의 자리에 사용하는 사랑을 올려놓으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삶이 무질서하게 된다.
자녀가 우상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어떤 부모들은 완벽한 자녀를 원하기 때문에 아주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훈련을 시키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로 위로하지만 소용 없다. 그것이 마음의 우상 때문임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자녀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버릇없는 응석받이로 키울 수도 있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훈계의 균형이 아니다. 그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균형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확실한 길이다.
과도한 사랑은 언제나 집착으로 변질되고, 적당한 거리를 무시한 사랑은 무례한 사랑으로 변신한다. 때문에 최고의 자녀교육이란 어쩌면 부모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건강한 부모를 통해 건강한 관계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우상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있다. 아빠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과연 이 녀석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문제는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나의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 이길탁 목사(강남D공동체)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