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어릴 때 부모를 잃은 아이가 있었다. 밤거리를 헤매며 울고 있는 아이를 불쌍히 여긴 어느 사람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갔다. 마침 그 집에는 자식이 없었다. 아내와 상의하여 그 아이를 호적에 올렸다. 아이는 친부모 이상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학교도 잘 다니고 무사히 군에도 다녀왔다. 안정된 직장도 구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물음이었다. ‘나를 낳은 부모는 누구인가?’, ‘내 고향은?’, ‘내 진짜 이름은?’….▼ ‘나는 누구인가?’ 이 사람의 물음은 바로 자기 실존에 대한 물음이었다. 부모를 잃은 자가 자기의 실존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모두 자신을 잃었다. 그래서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나는 누구’라고 내세우지만 두, 세 번 깊이 물으면 모두들 자신이 없다. 실존적 질문 앞에 자기의 실존을 밝히지 못한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레위인이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네가 누구냐?”, 세례 요한이 답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세 번을 아니라고 대답한 후에야 세례 요한은 자기의 실존을 밝혔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위대한 자기 선언이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실존의 긍정을 위해 세 번 ‘아니요’라고 자신을 부정하였다. 이렇듯 자기 긍정, 실존의 발견은 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 ‘부정’과 ‘긍정’을 혼돈한 최초의 사람은 아담이었다. 아담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한’ 것에 관심을 보였기에 긍정해야 할 ‘생명나무’를 부정했고, 부정해야 할 ‘선악나무’를 긍정하였다(창 3:6).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돈, 권력, 조직, 성장, 기복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한’ 것으로 여김으로 ‘부정’과 ‘긍정’을 혼돈하지는 않는지…. 세례 요한의 외침이 진정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아멘. / jsc@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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