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2008년 3월 16일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자기의 의지대로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태어났기에 어울러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똑같은 유대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난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지 못했다. 마을 어귀 뽕나무 그늘 밑에 쪼그리고 앉아 구름과 해와 별과 달을 친구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상이 미웠다. 성공만이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로마의 신임을 얻고, 돈을 벌기로 했다.   ▼ 세리가 되었다. 로마의 신임이 커졌고 드디어 세관의 우두머리 자리에 올랐다. 어느 누구도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은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산다는 것이 불안하고 허망했다. 큰 고독감이 삶 전체를 흔들었다. 그 무렵, 한 청년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이 젊은이에 대한 소문은 들을수록 감동적이었다. 먼 기억 속에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왈칵 그리움이 솟았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 사람에 대한 열망으로 길을 나섰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무리를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무에 오르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유일한 벗이었던 그 뽕나무였다. 놀랍게도 그 분이 나무 곁으로 다가 왔다. 더욱 놀라운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19:5). 이 넓고 넓은 세상에 나와 ‘친구’가 되겠다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쟁이 집’, ‘죄인 세리의 집’이라며 모두들 피해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 억척스럽게 모으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던 나에게  그의 인자한 미소가 ‘이제는 나눌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에게 고백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눅19:8).   ▼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라면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그의 말이 ‘뜨거움’으로 깨달아졌다. 구원은 아무도 찾지 않는 나를 ‘친구’삼아 찾아 온 ‘무조건적인 은혜’요, ‘무조건적인 나눔, 모든 착한 일에 넘치게 하는 일’이었다. 고난주간을 맞는 우리에게 깊이 묵상하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8). 아멘.                          / jsc@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