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온누리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깊은 대화이다. 그래서 기도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요, 끊임없이 치솟는 성취욕구와 집착과 탐욕을 훌쩍 뛰어넘어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 캐빈 밀러(Calvin Miller)의 말이다. “탐닉과 영성을 맞바꾼 우리는 자유를 잃은 것이 되었다. 파스칼이 옳았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만 채워 줄 수 있는, 하나님 형상의 공허가 있다 … 하나님이 그 내면의 공허를 성령으로 채워주실 때 우리는 산다. 그러나 그 공허가 채워지지 않으면 파괴적인 욕구들이 우리의 좋은 의도들을 통해 떼를 지어 몰려든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것은 능력을 주시는 위대하신 분과 동떨어진 삶을 살기 때문에 늘 나타나는 일종의 무력감이다. 우리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면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면 결국 번잡한 제자도의 요란스런 일정들만 남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도는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며 번잡함을 떠나 변함없는 헌신과 고요히 흠모하는 삶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결코 요란스러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형적인 성취를 추구하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외식적인 기도에 매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도 잘 하는 사람’임을 은연 중 자랑하거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은근히 과시하려고 한다. 예수님이 꾸짖은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밀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아침에 불병거를 위해 기도하고 어둑해질 무렵 그 불병거를 타고 교회로 가기 원한다. 불을 위해서는 거의 기도하지 않으면서 손에 들고 있는 성냥갑을 찾으려고 눈을 뜬다.” 

 

▼ 예수님이 모범으로 보여 주신 ‘은밀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상이 따른다. 그 응답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최선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아멘. 

작성자  온누리